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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Apr 29. 2016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들려주는 체르노빌의 살아있는 목소리

무엇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까?

아주, 아주 긴 글이 될 거 같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Svetlana Alexievich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Svetlana Alexievich1948년 5월 31일 출생)는 벨라루스의 탐사 보도 기자이며, 비-소설 작가이다.


그녀는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으며 "그녀의 다성음악 같은 글쓰기는,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에 대한 기념비이다."와 같은 평가를 받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벨라루스 작가이다.


그녀의 책은 정서적인 역사를 추적한다. 소련과 소련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들을 조심스럽게 구축한다.

러시아 작가이자 비평가 드미트리 비코프(Dmitry Bykov)에 따르면, 그녀의 책은 같은 벨라루스의 작가인 알레스 아다모비치(Ales Adamovich)의 다양한 아이디어에 많은 빛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알레스 아다모비치(Ales Adamovich)는 20세기의 영광을 묘사하는 최고의 방법은 '허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의 진술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벨라루스 시인인 울라드 지미 르 나야클랴예프(Uladzimir Nyaklyayew)는 아다모비치를 "그녀의 문학적 대부"라고 불렀다. 또한 알레스 아다모비치(Ales Adamovich), 얀카 브릴(Janka Bryl), 울라드 지미 르 카레스닉(Uladzimir Kalesnik) 세 공동 저자가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시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소설 <I'm from the Burned Village>가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적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이야기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 아다모비치와 벨라루스 작가 바질 비카유(Vasil Bykau)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바를람 샬라모프(Varlam Shalamov)를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평가했다. 그녀의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영어 번역작 중)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모은 <Zinky boys : Soviet Voices from a Forgtten War)와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구술 역사를 찬미하는 <Chernobyl Prayer / Voices from Chernobyl. 한국어판 제목: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가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작업의 주제를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우리 역사 전체를 돌아본다면, 소련이든 소련 이후든, 거대한 공동묘지와 피의 바다를 떠올릴 것이다. 사형 집행인과 피해자의 영원한 대화록. 저주받은 러시아인의 질문 : 무엇이 그렇게 했으며,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혁명, 굴라그(구소련의 교정 노동 수용소 관리국), 세계 2차 대전, 소련-아프간 전쟁으로 감추어진 사람들, 제국의 몰락,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유토피아, 그리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전 - 체르노빌. 이것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다. 이것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나의 길이고, 지옥의 굴레이다."


그녀의 첫 책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1985년에 출간되었다. 책은 2백만 부 이상 팔렸고, 재판되고 있다. 이 책은 1983년에 완성되었고 소련의 문학 월간지인 Oktyabr에서 1984년에 출간하였다.

1985년, 이 책은 몇몇 출판사에서 출간하였고, 5년 동안 2백만 부 이상 출고되었다.

이 소설은 이전까지 들려준 적 없었던 세계 제2차 대전의 다른 측면을 참전 여성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또 다른 책, <The Last Witnesses : the Book of Unchildlike Stories>는 전쟁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을 묘사하고 있다. 전잰을 여성과 아이들의 시선으로 재구성하여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 1993년, <Enchanted With Death>을 출간한다. 이 책은 소비에트 연합의 몰락으로 인한 자살 시도와 자살자를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이 역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책은 1993년 이후에도 벨라루스 국유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못했는데, 개인 출판사에서 단 두 권만 출간했다. <Chernobyl Prayer>가 1993년에, <Second-hand Time>이 2013년에 벨라루스어로 번역하여 출가하였다.

그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저널리스트로 불린다.



사람들은 화를 냈다.
특혜를 받고 싶은 게로 군!


세월호 특별법 반대 집회.
어떤 공무원은 나한테 화를 냈다. “체르노빌 특혜를 받고 싶은 게로 군! 체르노빌 돈을 받으러 왔어!” 그때 내가 어떻게 정신을 잃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된다.

그들이 이해 못 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은 관심도 없었다. 나는 나와 남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었다. 우리 사랑 탓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오래된 예언 中.



가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인류는 다양한 분양에서 진보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룬 것은 인류(人類)였지 인간(人間)은 아니었다. 특히나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독재를 찬양하고, 전체주의를 미화한다. 그것이 틀렸음을 말하는 목소리를 향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거지, 틀린 것이 아니다'고, 또는 우리만이 옳다고...


19세기 전후, 인류는 과학이 새로운 절대 진리가 될 수 있음을 믿었다. 숫자와 수식이 자연과 우주의 절대적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물론 지금도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과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며 계속 수정되어야 하는 진리임을 깨달았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21세기 우리는 처음으로 진리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 수만큼의 진리가 존재한다.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는다. 전 우주를 통틀어서 인간이라는 종은 유일할 것이며,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존재,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다름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것, 틀린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것을 믿고, 강요할 때 폭력이 생겨난다. 이런 종류의 폭력은 무지 혹은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된다. 미디어는 잘못된 믿음을 전파하기에 효율적인 수단 중 하나이다. 19세기에도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이것이 타인을 향한 폭력의 일종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다.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자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세월호 사고가 터지자 청와대는 자신들이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했다. 고르바초프는 온갖 방호복을 입고 체르노빌을 방문했다. 정작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도 몰랐다. 박 대통령은 고르바초프가 방호복을 입었듯, 수많은 경호원을 대동했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왜 비극은 항상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왜 비극 속의 주인공들은 항상 똑같은 걸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혹은 체르노빌 참사

(Chernobyl disaster or Chernobyl Accident)


구역으로의 첫 방문. 거기로 가는 길에, 모든 것이 회색 재로 덮여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까맣게 그을린 채로.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을 떠올렸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황홀했다! 봄의 초원에 꽃이 폈고, 숲의 녹음은 부드러웠으며 봄 향기를 내뿜었다. 나는 이 계절을 정말 좋아한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자라며 노래하는.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아름다움과 두려움의 어울림이었다. 두려움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였다.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

-데카르트 철학과 부끄럽지 않으려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은 이야기 中.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위치

이 끔찍한 재앙은 프리피아트 근처 도시와 벨라루스와 드니프로 강의 행정상 국경에 있는 체르노빌 발전소의 4번 원자로에서 시작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시스템 테스트 중 예상치 못한 급격한 출력 상승이 있었고, 긴급 차단을 시도했지만 출력은 계속해서 상승하면서 내부 증기압은 과도하게 상승하면서 터지고 말았다. 나머지 열이 수증기를 흑연과 반응시켜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만들어서 2차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 두 번의 폭발은 반응로의 뚜껑에 이어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을 날려버렸고, 이후 감속재인 흑연이 타면서 화재가 일어남과 동시에 최소 500경 베크렐, 최대 1200경 배 크렐 가량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누출되었다.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400배.

낙진은 소련 서부와 유럽의 대부분을 덮었다. 1986년부터 2000년까지 350,400명이 대피하였고, 가장 심하게 오염된 벨라루스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강제로 소개되거나 이주하였다. 구소련의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낙진의 60%가 벨라루스에 떨어졌다고 한다.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사고 환경 영향 평가에 따르면 레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지속적이고 심각한 오염물질 제거와 건강 관리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또 다른 UN 기관 UNSCEAR은, 사고 이후 국제적인 방사능 노출 치를 추산하였고 "이는 전 세계가 21일 동안 자연방사능에 노출된 수치와 동일"하다고 한다. 개별적으로는 자연방사능을 50년간 노출된 수치와 비슷하며, 사고 지역 복구 노동자 530,000명은 그보다 높았다고 한다.


폭발 직후 촬영한 파괴된 원자로 4호기의 사진. 수백 장을 찍었는데 대부분 필름이 방사선으로 다 타버렸고 그나마 괜찮은 사진 하나.

방사선 피폭에 의해 56명이 사망했으며 인근 주민을 제외하고 발전소 해체와 봉인을 위한 과정에 투입되었던 인부 중 고도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 때문에 죽은 건지 확실치는 않아서 비공식 집계로 남아있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소련 정부가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선 수치를 10배로 부풀려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한된 사람들만 치료해준 것이다.


그 외에 민간인 피해도 엄청나서 이후부터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갑상선암, 백혈병, 유방암 등등 온갖 질병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피해자 집계는 기준에 따라 다양한데 그린피스는 약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신체장애자 동맹은 우크라이나 내의 피폭자가 약 350만 명(그중 미성년자 120만)으로 사망자는 2005년 기준 150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러시아 정부에 의하면 러시아의 피폭자는 145만 명이라고 한다. 


일단 벨라루스(벨로루시), 러시아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위로 불고 있었던 탓에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가량이 떨어져서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남한 면적의 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인하여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 사건 이후 러시아에 근접한, 아니 근접하지 않은 유럽 여러 나라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된다. 


서방 세계,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 내 원전 반대 여론과 집단 패닉 사태를 우려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감추었다. 체르노빌 사건 관련 자료는 당시 즉각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 규모에 맞먹었던 것으로 구소련의 붕괴를 불러일으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들인 비용에 미국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소련의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더군다나 사우디와 영미권 업체 간의 치킨게임으로 인해 석유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쓰는 돈은 그대로인데 걷어들일 돈은 크게 준 상태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사건을 수습하는데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버리는 바람에 소련경제가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뛰어난 기술일수록 재앙이 더 무시무시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다.


일본에 재난이 닥친 날은 공교롭게도 미국 애플사의 팬들을 흥분케 한 2세대 아이패드의 출시날이었다. 오늘날 인간은 첨단기술이 편의와 즐거움만을 제공하길 기대한다. 그리고 시장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에만 투자한다. 우리의‘소비’는 끝없이 증가하고, 그것을 ‘진보’라 부른다. 살상 무기가 개발되어도, 그것을 진보라 부른다. 방사선 때문에 죽어가는 체르노빌 레츠와 얼마 전 재난을 당한 일본인, 그리고 희생자의 유족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신형 휴대전화 혹은 자동차와 삶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한국어판 서문 中.


과학 기술에 대한 절대적 신뢰, 절대적 믿음은 체르노빌이라는 재앙을 가지고 왔다. 당시 소련은 원자력 발전소는 핵폭탄과 다르다고 선전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핵폭탄이 다른 얼굴을 가진 쌍둥이임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쌍둥이들은 언제든지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


당시 체르노빌에는 특별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상황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과학적 수식은 명백하니, 그대로만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들은 매우 명백하고,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경험하지 못한 재앙을 가지고 왔다. 홀로코스트와 체르노빌이 바로 그러한 사건이다. 세계적인 재앙 앞에서 인간은 무력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예루살렘의 기록을 보면 그리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학살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인간의 고통을 인식할 의지도 여유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색, 무취의 죽음 속에 머물렀지만 인식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고,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인류는 이러한 위기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과거의 경험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체르노빌에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인간은 인간 인식 너머에 있는 것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체르노빌 레츠

그들이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나는 신이 두렵지 않아요. 사람이 무서워요. 처음에 여기 방사선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어요. 그러니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이 땅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 (눈물을 닦는다) 사람들이 떠났어요. 무서우니까요.

그런데 이곳은 거기만큼 무섭지 않아요. 우리에겐 고향이 없어요. 돌아갈 곳이 없어요. 독일인은 다 독일로 돌아갔고, 타 타르인은 허락을 받고 크림으로 갔지만, 러시아인을 반기는 곳은 없어요. 희망이 있기라도 하나요? 뭘 기다리죠? 러시아는 너무 크고 광활해서 자국민을 구해준 적이 없어요. 솔직히, 내 고향이 러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러시아식으로 자라지 않았어요. 우리 조국은 소비에트 연합이에요.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지 몰랐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총소리가 안 들려요.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여기서 집을 얻었고, 남편은 일자리도 구했어요.

...

사람들이 나르 보면 놀라요.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아이들한테 무슨 짓 하는 거냐며, 애들을 죽이는 짓이래요. 나도 자살하는 거래요.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 있어요. 마흔밖에 안 됐는데 벌써 머리가 다 하얗게 세었어요. 마흔인데! 하루는 독일에서 온 기자가 우리 집으로 오더니 나한테 물었어요. “자녀분들 은전 염병이나 콜레라가 도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있겠어요?” 전염병, 콜레라는 당연히 피해야죠.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이게 뭔지 나는 모르겠어요. 못 봤어요.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사람이 무서워요. 무기를 든 사람이…

-오래된 두려움과 여자들이 말할 때 남자들이 조용한 이유 中.


당시 소련은 내부적으로도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의 경제 중흥을 위해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새로운 경제 계획을 내놨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당제의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12월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각 지역에서 봉기와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련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삶이 어떻게 변할지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소련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분쟁지역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았다. 체르노빌은 그러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곳이었다. 싸움도 없고, 분쟁도 없다. 그곳은 죽음이 내려앉은 곳이었지만, 안전했다. 모순적이지만 그랬다.


위험한 곳에서의 삶과 체르노빌에서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체르노빌은 세대를 거듭하는 고통이고, 위험한 곳에서의 삶은 자신만의 고통일 수 있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위협을 피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정서적 안정을 찾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내 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조금 더 자라면 나한테 묻겠지. “왜 나는 달라요?”

갓 태어난 딸은 아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루였다. 온몸이 구멍 하나 없이 다 막힌 상태였고, 열린 것이라곤 눈뿐이었다. 의료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선천성 병리현상 : 항문 무형성증, 질 무형성증, 좌 신장 무형성증…’ 학술적 용어로는 그렇게 표현하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 설명하 자면 잠지도, 똥구멍도 없고, 콩팥은 하나라는 얘기다. 이튿날 딸을 수술실로 보냈다. 태어난 지 이틀 된 아이를… 아이가 눈을 뜨고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나는 아이가 울려는 줄 알았다. 오. 주님. 아이가 웃었다! 내 딸 같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바로 죽는다. 내 딸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안 죽었다. 4년 동안 수술을 네 차례 했다. 이런 복잡한 병리 현상을 지니고 살아남은 유일한 벨라루스 아기가 내 딸이다. 나는 딸을 매우 사랑한다 (잠시 멈춘다) 나는 아이를 더 낳을 수 없다. 용기가 없다. 산부인과에서 돌아온 후로 남편이 내게 키스하면 나는 벌벌 떤다. 우리는 이러면 안 돼. 이건 죄야. 두려워. 의사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 애는 셔츠를 입고 태어난 게 –‘행운아로 태어난다’는 비유적 표현 - 아니라 갑옷을 입고 태어났어. 텔레비전으로 방송만 하면 아무도 아기를 아 낳으려 할걸?” 우리 딸 얘기였다. 그런 얘기를 듣고도 어떻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가?

-오래된 예언 中.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 국가 지도자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처우가 있었다면... 이 거대한 비극에서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항상 이러한 비극 뒤에 희망은 사람이었지, 정부나 국가가 아니었던 거 같다. 혹은 그들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해봐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거니까.


새삼스레 故노무현 대통령의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당시의 영상이 유행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것이 당연한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행동이 위대해 보인다는 사실이 굉장히 슬프다.


그때나 지금이나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금전적 요구가 아니다.

그것을 금전적 요구로 인식하는 그들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그건 아니다.

알면서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알 수 없다.

알고 했다면 관료주의 행태와 금전적 이득에 물든 썩어빠진 인간이고, 모르고 했다면 무지하고 멍청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체르노빌 전투

Battle of Chernobyl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젊은 친구들이었소. 그들은 지금 죽어가지만,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잘 아는 친구들이오. 그들은 뛰어난 문화 의식을 가졌소. 승리의 문화, 희생정신의 문화…

핵폭발의 위험이 존재하던 때가 있었소. 용해된 우라늄과 흑연이 지하수에 들어가지 않도록 원자로 아래에서 지하수를 빼내야 했소. 우라늄과 흑연이 물과 섞이면 임계질량 - 핵분열 연쇄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의 최소 질량 - 이 형성되기 때문이었소. 폭발력이 3~5 메가톤쯤 됐을 것이오. 키예프와 민스크만 초토화할 뿐 아니라, 거의 유럽 전체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변했을 것이오. 상상이 되오? 전 유럽적 재앙, 그 지하수에 들어가 배수 밸브의 꼭지를 틀 사람을 모집했소. 자동차, 집, 별장과 가족 생활비를 평생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소. 자원자를 구했소. 그랬더니 나타났소! 청년들이 잠수해, 그것도 여러 번 잠수해서 밸브를 열고 닫았지만, 팀 전체에 7천만 루블만 지급했소. 자동차와 집에 대한 약속은 잊어버린 거요. 물론 그런 것 때문에 거기에 들어간 것은 아니오! 물질적인 것 때문은 아니오. 물질은 가장 작은 이유였소. 우리 사람들은 그렇게 쉽지 않소. 겉으로 봐서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오.

-역할과 슈제트에 대한 갈망 中.


공수표를 남발하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국가였다.

우리는 주권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을까?


밸브를 닫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책에서 배운 대로, 영화에서 본 대로 행동했다. 그것이 올바른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었다. 목숨이 아까워서 올라가지 못한 사람을 욕하고 싶진 않다. 평범한 공포에 평범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국가적 영웅이었다.

소련을 빛내던 위대한 지성들은 비극 속에서 몸을 숨겼다.


그들보다 빛났던 것은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소련의 붕괴


1991년 8월 쿠테타 중 붉은 광장의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소속 전차
우리 과학 아카데미에 저준위 방사선과 내부피폭 전문가였던 체르사코바 박사가 일한 적이 있다. 그런데 체르노빌 사고 5년 전에 우리나라에는 핵 사고가 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체르사코바 박사의 연구실이 폐쇄됐다.

“사고라뇨? 소비에트 핵발전소는 세계 최고의 첨단 시설이잖소. 저준위 방사선이라니, 내부피폭이라니, 방사성 식품 말이요?”
연구실을 축소하고 박사들을 은퇴시켰다. 체르사코바 박사는 어딘가 수위로 취직해서 코트 보관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5년 후, 어린이 갑상샘암 발병이 30배 증가했다. 선천성 기형, 신장과 신장 질환, 소아 당뇨도 많이 늘어

10년 후, 벨라루스인의 평균 수명이 55세로 줄었다.

나는 역사를 믿는다. 역사의 심판을 믿는다. 체르노빌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했다.

-한 사람의 거대한 권력 中.


그렇게 소련은 망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서기관과 몇 사람의 최고위원이 결정한다. 그들은 몇 만 명을 게임처럼 움직이고, 죽인다. 그들이 그만큼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알았을까? 그들은 그 무게를 짊어지기보다, 가족들을 외국으로 대피시켰다. 그들은 인민을 위하고 있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곧 해결될 거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해결된 것은 없었으며,

그들의 자손은 매우 건강하게 살고 있으며,

체르노빌은 지금도 죽음과 함께하고 있다.




Epilogue


주민이 대피된 이후 버려진 프리피야트의 파노라마 사진. 2007년에 촬영되었다.
핵 보다 상부의 진노를 더 두려워했다. 모두 전화와 명령을 기다렸지만 직접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개인이 지는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측정기를 가방에 넣어 다녔다. 왜 그랬을까? 온갖 사무실을 찾아다녔지만 나를 안 들여보내고, 나만 보면 짜증을 냈다. 그럴 때면 측정기를 꺼내 비서나 개인 운전기사의 감상샘에 들이댔다. 그들은 놀랐고, 가끔 효과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왜 그렇게 과민반응 하세요? 벨라루스 국민 걱정하는 사람이 교수님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사람은 다 죽잖아요. 담배 때문에 죽고,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잖아요.”

-한 사람의 거대한 권력 中.



짤막한 발췌와 사진 밑에 어떤 글을 쓴다는 게 이다지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사실 핵의 위험성 같은 것들이 떠오르진 않았다.

다만 세월호 사건이 겹쳐 보여 너무 힘들었다.


핵이 가지는 위험성만큼이나,

그 위험성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에너지 생산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고,

에너지 사용량을 절감하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지나치게 긍정적 일지 모르지만,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개인의 의지가 모여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긍정적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을까?





함께 읽기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된 사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들


위키백과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Hiroshima Peace Day

by Yoneda Tomoko

Photographed on 6th August 2011 (The day the atomic bomb was dropped)


2011년 3월 11일,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자연재해로 기록된 지진이 일본 동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유래 없는 쓰나미의 후유증과 동일본 지진의 사후 충격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이 나라는 다시 한 번 후쿠시마 다이이치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재앙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아직도 떠오르는 일상적인 공포가 되었다. 연약한 인간들은 온갖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공포를 목격했고, 현상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해서 개인은 저항할 힘을 상실했다.
 
이 비극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고 참여하는지 역공 동체와 국가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새로운 긴급 상황을 인지하면서 우리는 눈을 뜨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복종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세계 초강대국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치열한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고, 과거에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승인해왔다. 지금 이곳 도쿄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러한 일들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궁극적으로 내 마음속에서 이 사건들은 인간 존재의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의구심에 대한 해답을 찾으러 다니게 했다. 인간 존재가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있는가?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고분자 바이오소재 중에 그 소재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그런 것이 있는가? 모든 것이 늘 비가시적이었다. by 요네다 토모코


출처 : http://www.tomokoyoneda.com



체르노빌의 봄

by 엠마뉘엘 르파주


니카라과 내전을 다룬 《게릴라들》의 저자 엠마뉘엘 르파주의 르포르타주 만화 『체르노빌의 봄』. 저자가 직접 방사능에 노출된 참사 현장으로 가서 체르노빌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경험할 수 있는 현상들을 실존주의적 고뇌 끝에 그려내어 4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목탄, 수채화, 연필, 페인트 등 다양한 도구들을 통해 체르노빌의 봄을 몽환적으로 표현하면서 삶과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https://youtu.be/awH6GwULFJk



체르노빌의 전투

Battle of Chernobyl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https://youtu.be/Pdd_B7heK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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