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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Apr 30. 2016

위대한 개츠비 / The great Gatsby

by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ztgerald)

사진 :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 film)> 스틸컷



들어가며

위대한 미국 문학 작품을 꼽을 때  항상 1-2위를 다툰다는 소설이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흠 뭐라고 해아 할까....


판단을 좀 유보해보자.



















스콧 피츠제럴드

F. Scott Fiztgerald


프란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는 미국 소설가이자 단편작가로서, '재즈 시대(Jazz age)*'의 전형적인 작품을 보여준다.

피츠제럴드는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의 일원이었다. 그의 작품으로 <This Side of Paradise>, <The Beautiful and Damned>, <The Great Gatsby>, <Tender Is the Night>가 있다. 그의 다섯 번째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인 <The Love of the Last Tycon>는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피츠제럴드는 많은 단편으로도 유명한데, 젊음과 약속, 나이, 절망이 주된 주제이다.


그의 작품은 첫 출간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출간을 도운 T. S. Eliot은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소설이 헨리 제임스(Henry James)*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찰린 잭슨(Charles Jackos) 작품 <The Lost Weekend>의 주인공인 Don Birnam은 그 자신이 <위대한 개츠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40년대에 쓰인 편지에서 셀린저(J. D. Salinger)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하며, 셀린저의 전기 작가인 이언 해밀턴(Ian Hamilton)은 그 자신(셀린저)을 피츠제럴드의 수제자처럼 생각했다고 전한다.


종종 피츠제럴드와 비견되는 작가 리처드 예이츠(Richard Yates)*는 <위대한 개츠비>를 "그가 읽은 소설 중에 가장 큰 자양분이 된 소설... 기적과 같은 재능... 기술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 피츠제럴드 사후의 사설에서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현실과 문학적 의미에서 한 세대를 발견해냈습니다. 그는 그 세대를 해석하였으며, 이끌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이 세대는 황혼기에 접어들어 달라질 것이며, 무너질 것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와 그의 다른 작품들은 21세기에 와서도 백만 부 이상 팔리고 있으며, 특히 베스트셀러의 정수인 <위대한 개츠비>는 많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필독서로 꼽힌다.


*Jazz age는 1920년대를 가리키며, 대공황과 함께 막을 내렸다. 미국에서 재즈 음악과 춤이 유행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로 영역을 넓혀간다. 뉴오를란에서 시작된 재즈는 아프리카와 유럽 음악과 결합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었고, 이후의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미국 출신의 소설가이며,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가 있다.


*리처드 예이츠(Richard Yates)는 미국의 작가이며, 19세기 중엽의 '시대의 불안감'을 다루고 있다. 그의 첫 소설로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가 있으며, 이 소설은 케이트 윈슬렛,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로도 각색되었다.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주인공, 제이 개츠비, 데이지 뷰캐넌, 톰 뷰캐넌. 호불호는 갈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한 영화 중에 가장 좋았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가 품어 온 환상의 거대한 힘 때문에 말이다.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을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온갖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 그 어떤 정열도, 그 어떤 순수함도 한 인간이 그의 유령 같은 가슴속에 품게 될 것에 도전할 수 없으리라.


 '결혼은 그놈이랑 하는 게 아니라, 그 놈인 줄 알았던 어떤 놈이랑 하는 것'이라는 말을 처음을 들었을 때,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아직 결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 한 마디를 보는 순간 이것은 진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어준이 했던 말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와 함께 추천했던 것이 해외여행이었다. 게다가 자금이 넉넉하면 안 된다고 했다. 넉넉하게 챙겨가면 그놈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다나? 대부분 돈으로 해결 가능하니까. 그래서 진짜 그놈을 알고 싶으면, 가난하게 해외여행을 가라고 했다. 그러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부터 해결 방식까지, 그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결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며...


 그가 해외여행을 추천하는 것은, 한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조건과 이름이 덧씌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물이나 상황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상징을 덧 씌운다. 누군가에게 100원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먹는데 쓰는 돈이겠지만, 누군가에겐 행운의 동전처럼 여겨질 수 있으니 말이다. 특정 사물이나 사람에게 '아우라'를 씌우는 건, 그 대상이 어떤 의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것이 가질 수 없는 것이거나...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들여다보지 마시오'와 같은 금지 문구라고 강신주 박사는 이야기한다. 일종의 터부(Taboo)*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다. 물론 금지된 것뿐만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이 욕망의 대상일 수도 있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다른 이들이 동경하는 것을 욕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허상이라는 것은 대부분 앞서 설명한 다양한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욕망의 근원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형태의 허상이 만들어진다. 특히 욕망의 대상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거리에 존재하고 있을 때 더더욱 환상은 화려해진다.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멀 때는 편향된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너무 가까울 때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세 사람(제이 개츠비, 데이지 뷰캐넌, 톰 뷰캐넌)이지만, 주된 화자는 '닉 케러웨이'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모든 일에 판단을 유보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 때문에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자주 나에게 다가오는 바람에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사람들에게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세 사람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단 한 사람, 그것이 그가 주인공인 이유일 것이다.


*터부(taboo)는 특정 집단에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금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금기는 만들어질 때의 상황이나 문화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서 변하기도 한다.




허상의 민낯


캐리 멀리건은 원작의 데이지 뷰캐넌을 잘 보여주었다. 특히 이미지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해서 놀라웠다.
그는 그 과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가 되돌리고 싶은 것이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 들어간, 그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그의 삶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졌지만, 만약 다시 한 번 출발점으로 돌아가 천천히 모든 것을 다시 음미할 수만 있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 전에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위대한 개츠비>는 욕망으로 시작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이 이 소설의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개츠비는 가난과 동떨어져 빛나는 데이지를 사랑했다. 톰은 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데이지를 쟁취했다. 톰은 승리를 갈망한다. 그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수많은 남성이 갈망하는 한 여성이다. 그리고 그는 그 여성을 챙취한다. 그리고 그가 쟁취한 것은 경쟁자들 사이에서의 승리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데이지는 화려한 삶을 사랑한다. 그가 제이 개츠비가 아니라 톰을 고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화려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재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하지만 세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사랑한다. 그나마 이 세 사람 중에서 개츠비가 순수해 보이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하면서도 욕망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츠비는 5년 전에 만났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매주 거대한 저택에서 파티를 벌인다. 그는 그 이유를 사랑에서 찾았다.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찾아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을 사랑했다. 그녀는 근본 없는 개츠비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고, 그녀와 함께라면 그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진 재력과 데이지가 가지고 있는 명성이라면, 상류사회로의 진입은 현실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데이지 뷰캐넌이란 여자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원하는 가련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었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이성복 시인은 '연인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항상 다른 곳을 쳐다본다'고 이야기했다
개츠비는 부가 가둬 보호해 주는 젊은 신비, 그 많은 옷이 풍기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데이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 버리고 난 뒤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자기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말끔히 치우도록 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순수한 호의를 선택한다. 자신의 순수하지 못한 사랑과 욕망을 인정한다. 그의 순수한 호의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개인적으로 <위대한 개츠비(2013 film)>의 마지막  장면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 장면에서 닉 캐러웨이는 재이 개츠비를 떠올리며 원고를 남긴다. 원고의 제목은 <Gatsby>. 원고를 남기고 떠나려는 찰나, 그는 돌아서서 제목에 한 단어를 더한다. The Great Gatby.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톰과 데이지는 욕망 속으로 몸을 숨겼다. 지금까지 해왔던 선택을 다시 한 번 하는 것은 위대하지 않다. 


위대한 것은 지금까지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에 있다.



Epilogue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영문학에서 항상 1,2위를 다투는 소설이다. 아마도 번연 된 언어로 읽어서는 느낄 수 없는 영어 문장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1920년대 'Jazz age' 속의 미국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역사를 모르니 알 길이 없다.


아마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훨씬 더 훌륭한 문학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위대한 개츠비>는 충분히 훌륭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론 영화도 괜찮았으니, 소설과 함께 읽으면 훨씬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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