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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May 05. 2016

에로스의 종말 / Agonie des Eros

멜론 top 100이 보여주는 우리들의 사랑?

대표 이미지 : Melancholia(2011), Direted by Lars Von Tire, Still-Cut


들어가며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10-05
“이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사랑의 다양한 옵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타자’ 자체가 없어져서이다. 그저 자기 확신을 가져다주는 페이스북 친구나 ‘좋아요’처럼 ‘자신의 거울’밖에 없는 것이다. 타자가 그렇게 전락할 때 진정한 타자는 사라진다. (거울을 보고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에로스 종말의 궁극적인 원인인 것이다. 타자가 없어지면 자아도 없고, 공허해진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와 다르다. 나르시시즘은 나와 타자의 경계가 없다. 자기애는 나와 타자의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병철, 독자 강연회 中.


지금까지 한병철 씨의 여러 저작을 읽었습니다만, 사실 새로운 성찰이라거나 문제제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폐해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다만 제가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철학자와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벗어나,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영화'를 통해서 지금의 현시대를 읽어내려는 이전과는 다른 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인용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중문화'를 통해서 대중들이 어떤 메시지, 주제, 판타지에 열광하는지 포착하고, 왜 그런지 고민하고, 다양한 철학자의 언어로 시대를 정의하려 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이전 저작들과 다를 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멜론 top 100이 보여주는 우리들의 사랑?


'시경'이나 '고려가요', '사티리콘'과 같은 고전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생활과 삶, 고충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문학'이라는 장르는 장대한 역사서에 가려져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원전의 사람들이 고민하던 문제들이 지금 우리의 고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고전시가, 가요들이 당시 사람들의 감성을 대변한다면, 지금 우리의 감성을 대변하는 것은 멜론 top 100일까요? 최근 DynamicDuo의 신보 'Grand carnival'의 4번 트랙 '타이틀곡'이라는 음악을 듣다 보면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DynamicDuo 8집 - Grand Carnival>, 개인적으로 명반으로 꼽는 앨범 중 하나입니다. 꼭 들어보세요.
결국 타이틀곡이 필요해 wanna make it rain
money money 돈 냄새나는 
관중의 떼창은 정말 짜릿해 
머니머니 해도 오래오래 효자 노릇하는 
사랑 얘기 멜로디 확 꽂히는 
후렴 범벅은 전국구로 가는 흥행공식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인데
대충 알 것 같아서 자꾸 병드는 기분 15년째

-Dynamic Duo, Garnd Carnival, 타이틀곡


그들의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잘 팔리는 노래는 아무래도 '사랑 노래'인 거 같습니다. 물론 이를 반증하듯 멜론 top 100에는 사랑노래로 가득합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한 시대인데, 한병철 씨는 '에로스의 종말'을 어떻게 읽어낸 걸까요? 오히려 우리 주변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야기와 사랑을 갈구하는 걸까요? 어쨌든 현시대에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선택의 다양성과 무제한성을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한병철 씨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타자의 소멸


<Melancholia(2011), by Lars Von Trie>는 사랑과 우울증의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의 종말 中.


한병철 씨는 사랑의 종말을 지나친 '나르시시즘'에서 찾습니다. 그는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을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로서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기애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경계가 존재하지만, 나르시시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애'적 존재는 '타자'와 '나'를 구분하는 최소한의 경계선을 갖추고, '타자'가 그 경계를 침범하면 강력한 부정적 반응을 통해서 자신을 방어합니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적 주체''타자''나'를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합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자'의 유/무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서문에서 '사랑이란...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다 보면 '전혀 내 예상대로 움직이거나 컨트롤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의 감정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발적인 자기 비움 또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언뜻 보면 자기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는 자신의 경계를 더 넓힘으로써 다양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긍정적 측면이 공존합니다. 


이는 성과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자기계발과는 다릅니다. 타자성은 부정성으로 획득되는데, 자기계발에는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YES WE CAN!"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긍정성만이 가득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 부정성으로 획득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타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가 필요한데, '성과주의 사회'는 계속해서 자신을 착취하고, 소모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나'라는 사람의 경계를 잃어가고, 결국 '타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착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대척점에 바로 '사랑'이 존재합니다. '사랑'안에서 '성공'이라는 것은 결국엔 '실패'와 다름없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져야 합니다.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합니다. 모순적이지만, '사랑'은 이러한 부정성 속에서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소유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붙잡다' '가지다' '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버립니다.


부정성 의상실

HER (film, 2013)은 자신의 취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이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안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에로스의 종말 中.


"그의 피부 skin은 나의 애무를 통해서 살 fresh이 되어간다." 장 폴 샤르트르가 한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입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문장에서 '나'의 쾌락이나 흥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관심은 '그'의 변화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나의 감각적 쾌락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그가 '나를 통해서 어떻게 변하는가?'입니다. 마르셀로 피치노는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주체의 부정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나서야 타자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타자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없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그의 변화를 캐치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보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어라', '끊임없이 개발하라', '한계를 인정하지 말라'. 긍정성이 만연한 사회 안에서 사랑의 부정성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갑니다. 


저자가 책 속에서 예로 들고 있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소설에서 주인공과 주인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철저히 자신의 쾌락을 위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쾌락을 위해서 건강한 음식과 운동과 같은 자기 관리를 요구합니다. 이는 '계약서'를 통해서 명시됩니다. 부정성이 사라진 사랑이란 일종의 계약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영화 <Her, 2013>에서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사랑에 빠지는 A.I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취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자주 사용하는 언어, 생활패턴, 평소 하는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A.I는 나의 분신과 다름없고, 이러한 A.I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A.I가 스스로를 정의하고 정체성을 찾으면서, 두 사람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사랑에는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이는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약서를 통해 명시된 사랑 love은 과연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고 있던 사랑 love과 같은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사랑의 문법이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새로운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자는 부정성 negativity이 상실된 사랑은 페티시적 fetishism 사랑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책에서는 부정성이 제거된 성애 sexuality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페티시즘 fetishism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신체 부분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스타킹이 될 수도 있고, 발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사랑은 오히려 포르노 porno에 가까워져 갑니다.



에로스를 찾아서

Eros (film, 2004)는 세편의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해당장면은 왕가위 감독의 "The Hand" 中


소설의 에로틱한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본 가장 '야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 공리 주연의 <Eros,2004>입니다. 위의 구절을 읽는데 바로 이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정사는 한 장면도 없습니다. 최근의 영화로는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 Stalker'나 김희애, 유아인 주연의 드라마 '밀애' 정도가 있겠네요. 언급한 작품들은 굉장히 야하지만(?) 전혀 야하지 않습니다. 에로스 Eros가 가지는 부정성 Negativity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문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의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나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섹시함을 어필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인류의 모든 문명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라는 말을 믿는 편입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섹시함을 어필하기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고, 철학적 세계관을 갖추고, 그림을 그리는 것. 지나치게 직관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종류의 직관성을 좋아합니다. 물론 지금 시대에 그런 것이 섹시함으로 어필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철학자는 친구이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연인이다. 하지만 이 연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개인도 아니고, 어떤 경험적 사례도 아니다.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이다. 강한 의미에서의 사유는 에로스가 아니라면 시작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플라톤


어쨌거나 어떤 것을 활용해서 어필을 하려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도 좋아해주면 좋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습니다. 결국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 그리고 이것은 사유의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에로스 eros를 잃는다는 것은, 타자를 잃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유의 불가능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타자가 없는 사유는 생명력을 잃은 채, 반복해서 재생산될 뿐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지요.



Epilogue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자에 대한 투자를 잘 조정해 절대적 손실이 없도록,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경영한다

-한병철, 독자 강연회 中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하기가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

문제는 자신이 주는 상처가 아니라, 자신이 받을 상처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썸과 연인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썸에 그치는 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의 상징이 아닐까?


들뢰즈는 '최고의 선물은, 주고 나서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사랑도 선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주었던 사랑을 잊어야, 상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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