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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Aug 29. 2021

이영도 단편선 두 권 읽어보았다

SF와 환타지 사이의 간극

하지만 일종의 사고실험적 속성이 있는 SF에서는 이영도의 이러한 특징들이 다소 거칠고 과장된 제스처로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스노브 기질이 있어서 "드래곤 라자"도 안 읽었거든? 나우누리로 여자애들 한창 꼬시던 시절, 어떤 애 닉네임이 unchi여서 "운치있는 걸 좋아하노?"라고 물었다가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라길래 '뭐야 그게'라고 좀 한심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한국 양산형 무지성 환타지나 무협지들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이영도 작품도 대충 그 비슷한 부류에서 그나마 좀 읽을 만한 수준이겠거니 하고 넘겨짚었던 것이다.


장편으로 스타덤에 오른 작가의 대표작은 거르고 단편을 먼저 읽었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건 순전히 리디북스로 인한 우연한 만남이었다고. 모친과 리디 아이디를 공유하는데 (나보다 훨씬 많이 읽으신다) 모친 픽에 있길래 한번 읽어본 거지. 단편집이라 부담도 없고 말이야.



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그랬어. 아이작 아시모프와 필립 K. 딕 사이 어디쯤 서 있는데 그들에 약간씩 못 미치는 느낌이었다. 아이디어가 아주 참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플롯에 강렬한 맛이 있지도 않았고 말야. 그 와중에 뭔가 "위트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느껴져서 살짝 불편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내가 조증에 가까운 상태에서 말장난 심하게 칠 때 친구들이 느꼈을 법한 피로감?


게다가 아시모프와 딕의 느낌이 난다는 것부터가 다소 시대착오적이랄까, 아 오해하진 말기 바란다, 둘 다 내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들이야. 다만 이영도의 단편에서는 20세기 중반에 나온 SF 팬픽 같은 맛이 났다는 거지.


오히려 단편집 말미에 광고성으로 삽입된 환타지 단편 "미리보기"의 내용이 흥미로워서 굳이 이영도 (환타지) 단편선을 추가 결제하여 읽어봤는데, 오 이건 아주 재미있었다. 역시 원래 노는 물에서는 다르다 이건가?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긴 걸까? 이영도 특유의 위트 있는 (혹은 깐죽거리는) 문체나, 다소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설정 등은 두 작품집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었는데 말이야. 후자가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워서 그런 걸까? 역시 이 작가는 단편보다는 중장편에 강한 건가? 아니면 기본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기대치의 차이인가? 즉 SF는 어쨌거나 현실과 닿아있어야 하지만 환타지는 그런 부담이 적으니까. 아냐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이영도 SF 단편들이 과학적으로 아예 말이 안 되는 설정을 갖다 쓴 건 아니거든.


한동안 고민하다가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일견 전형적이지만 살짝 비틀어놓은 캐릭터, 대놓고 아이러니한 설정, 블랙 유머로 무장한 문체 등을 근거로 이영도 단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의 단편들은 우화적이다." 이런 특징은 환타지 스토리텔링에서는 차별화된 강점이 된다. 낯선 스토리 속에서 현실과 연결되는 공감 포인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자아내거든. 옛날 이야기를 접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달까. 하지만 일종의 사고실험적 속성이 있는 SF에서는 이영도의 이러한 특징들이 다소 거칠고 과장된 제스처로 느껴지는 것 같다. 양념은 엄청 쳤는데 막상 고기 자체는 좀 밍숭맹숭한 맛인 느낌. SF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21세기라 더 그런 듯.


아무튼 환타지 단편 읽어보고 나니 드래곤 라자도 언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역시 먹어봐야 맛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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