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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Jul 11. 2021

[디스코 엘리시움], 엔딩을 보다

부서진 '나'와 다시 대면하는 법

한동안 쉬었다가 얼마 전부터 재개했던 디스코 엘리시움, 드디어 엔딩 봤다. 45시간 정도 플레이했네. 







용두사미 느낌이 없진 않지만, 독특한 시스템의 매력만으로도 플레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이라 생각한다. 플레이어가 스스로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 



텍스트의 양과 밀도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책 좀 읽어본 사람 아니면 힘들 수 있다. 게임성의 구할이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에서 나온다. 재미있긴 한데 장시간 연속 플레이할 때는 나도 좀 지치더라.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어 꽤나 묵직하다. 그럼에도 플롯이 매끄럽고 번역도 잘 되어 있기에 중간중간 쉬어가며 플레이 한다면 즐기기에 무리가 없다. 잘 짜여진 세계관이 자연스레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토록 세련된 방식으로 세계관을 설정하고 또 풀어내는 게임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후반부 전개가 옥의 티다. 퀘스트에선 슬슬 반복 패턴이 보이고, 플롯의 흐름은 플레이어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다. 프랑스 예술 영화 같은 느낌이랄까? 막판에 어떻게든 수습이 되긴 한다만 너무 서둘러 봉합했다는 혐의 또한 지울 수 없다. 



허나 이 게임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그런 건 그리 큰 흠이 아닐 것이다. 살인사건 수사는 단지 소재일 뿐, 게임의 진정한 목적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한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추락할 곳조차 없는 파탄자를 기어이 또 고통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선 2mm 정도의 균열, 그 반전의 틈새를 발견하게 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스물네 가지나 되는 자신의 내면적 자아들과 부대끼며 현실과 몽상 사이를 표류한다. 내적 자아들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투사되어 세계 자체의 양태를 변화시킨다. 어떤 세계인가? 사건의 배경, "레바솔"은 한때 제국의 심부였지만 혁명과 투쟁, 외세의 침략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가 겨우 재건이 시작된 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잠정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도시다. 코마에 빠진 도시랄까? 도시 자체가 파탄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관점에선 이건 주인공이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그림자들과 소통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플롯의 갑작스러운 전개와 마무리도 좀 더 이해된다. 마음의 돌파구는 표면적으론 언제나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축적-돌파의 방정식은 선형적이지 않으니까. 



이 게임의 텍스트에는 수많은 행간이 있다. 플레이어는 선택을 통해, 때론 비선택을 통해 그 여백들을 채워나간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와 주인공 캐릭터 간의 거리는 가까워지면서 동시에 멀어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점점 플레이어를 닮아가지만, 그럴수록 플레이어는 주인공과 무관한 게임 밖 실제 세계의 자신에게로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즉 게임 속 주인공은 진정한 자신(=플레이어)로부터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아무리 리플레이를 해도 소용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자신의 세계를 초월한다. 그 균열의 지점을 특이점, 창백, 공허,...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겠지. 




"디스코 엘리시움"이 집요하게 환기시키는 캐릭터/게이머의 구조 자체가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한 알레고리다. 우리는 부서진 채로 구멍 주변을 끝없이 맴도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있다. 우리가 구멍을 만들고 또한 구멍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의 주체성은 그러한 구멍, 즉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훼손하고 파괴하는 실패의 지점을 구성적 요소로 포함할 때만 추구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아이러니. 그러한 역설적 통찰에 힘입어 이 게임은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하-드코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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