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수영 좀 하지!

어설픈 잘난 척은 금물ㅡ주부 수영반 첫날 이야기.

by Anne

초등학교 때 남동생이랑 수영을 배우러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아주 감사한 일인데

그때는 옷 갈아입기 싫어서

젖은 머리로 옷 입기 귀찮아서

추워서

더워서

핑계도 가지가지 불만도 가지가지였지만

물에 빠져도 살아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 엄마의 생각 덕분에 우리 오누이는 4가지 영법을 다 마칠 때 까지는 열심히 다녔었다.


저질 체력에 몸치에 근육량 제로에

늘씬해 보이지만 우리끼리 다아는 그거.

40대쯤 찾아오는 마른 비만 판정까지 받은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수영밖에 없던 나는.

동네 가까운 수영장을 등록했다.

결혼 전 직장 다닐 때까지도 퇴근 후 개운하게 씻고 오는 재미로 열심히 다녔었는데,

결혼하고 애들이랑 워터파크 말고는 수영복을 입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호기롭게 수영장을 등록하고

개강 날짜를 기다리며 수영복 정비차 서랍에서 굴러다니는 수영복을 꺼내 들었는데

아니 이게 언제 이렇게 됐데?

엉덩이 부분은 늘어지고 고무줄은 다 삭아서 가루가 떨어지고 색은 바랜 건지 원래 그런 색이었는지..

수영복이 내 수영실력을 뽐내기에는 영 맘에 들지 않는 거다.


'아니 그래도 내가 어릴 때 선수반까지 했는데

이런 거 입고 기죽을 순 없지!

당장 수영복부터 사야겠다.

애들 오기 전에 얼렁 다녀와야겠네..'


청소기 돌리다 말고 느닷없이 수영복을 찾아가지고서는

하던 청소도 다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나갈 준비부터 했다.

늘 인터넷으로 편한 티셔츠 고무줄 청바지만 사다가 수영복을 사려니

'어디서 샀더라?

이왕 사는 거 오래 할 거니까 백화점을 가볼까? 이게 몇 년 만이야 나를 위한 선물이다 생각하고 하나 질러야지.'


혼자 비죽비죽.

'요즘은 이런 디자인을 입나? 이건 어디다 팔다리를 넣으란 거야?'

구시렁구시렁거리며 옷걸이를 들었다 놨다 하니까

점원이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어머 수영복 사시게요? 운동 시작하시는 거예요?"

하며 다가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오늘 꼭 살 거니까 어디 나한테 멋진 거 하나 추천해줘요!'라고 눈빛을 보내며.


"네 운동 시작하려고요. 호호호.."


"처음이세요? 아님 좀 하셨어요?"


"처음은 아니고 어릴 때 좀 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좀 과감한 거 입으셔도 되겠네.

애기 엄마 젊으니까 이쁘고 화려한 거 입어 요즘은 다들 그래"


요즘은. 요즘은...

요즘 사람이지만 집에만 있다 보니 좀체 요즘 사람이 되기 힘든 나에게는 아주 예민한 단어다.

"요즘은 이런 거 입나요?

진짜 디자인이 다양하네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끄덕끄덕하며 눈은 열심히 가격표를 찾는다. 가격표에 뭐가 이렇게 달린 게 많은지.

나는 그 숫자만 보면 되는데

무슨 성분에 어떤 대회 용품에 어떤 우수한 천인지 뭔지 아주 고리 하나에 주렁주렁 잔뜩 달려있다.

겨우 손가락을 제쳐 본 가격은.


169000원.

'컥! 수영복이 머 이리 비싸?'


갑자기 내가 큰맘 먹고 지르리라 생각했던 금액에 두배는 넘는 가격에 흠칫 놀랐는데,


이미 눈치챈 점원은

"아이고 요즘이게 워낙 잘 나와 한 번 사면 1년은 거뜬히 입지 1년 입는다 그럼 이거 12달로 나눠봐.

자기 커피 한잔 덜 마시면 되지 멀 하하하."


'이 아줌마가 이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시네.

그래. 머 내가 운동을 시작하면 1년은 해야지. 잘 관리해서 입으면 1년이 머야? 3년도 입지.'


"아줌마 이거 주세요.

할부되죠?"


"그럼 그럼 자기야 이거 그 머냐 무슨 연예인들 나와서 수영하는 프로그램 알지? 거기서 소녀시대 수영이 입던 거야. 찾아봐 내 말이 맞다니깐."


물건을 팔게 돼서 신이 난 점원은 내손에 들려져 있는 카드를 받아 빠르게 계산하고 비닐백에 담아주며 이야기한다.


'미쳤지 미쳤어.

아니 외출복도 아니고 수영복을.. 미쳤어.'


아이들 마치기 전에 서둘러 돌아와서 물 한잔 하니 갑자기 너무 비싼걸 산거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녁때 짝꿍한테 수영복을 보여주며

"너무 비싼 걸 샀지?" 하니깐

착한 내 짝꿍은

"요즘 다 그래. 잘했어. 운동 재밌게 해 "

하고는 쓱 웃어준다.


'그래 나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하는 건데 기죽지 말고 새 거 입고 재밌게 운동이나 하자. '


다음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뒷정리하고 청소기 후딱 돌려놓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는 수영장이라 쑥스럽기도 하고 새롭게 사람 만나는 것도 걱정이고!

애들 전학하는 것처럼 수영복을 갈아입고 레인 따라 걸어가는 길이 어찌나 길던지.


강사는

"어디까지 배웠어요?

저어기 끝에 서세요."


"아뇨. 저 다 배웠고요.

직장 다니는 동안도 계속했어요."

난 좀 하니까. 풋.


흘끔 보고는ㅡ'내 비싼 수영복을 봤나?'


"그럼 5번째 아줌마 저 뒤에 서요. "


"아이고 새댁 반갑네.", "몇 살이야?", " 어디 살아?"


궁금한 게 많은 아줌마들 사이에 서면서

'이제 시작이네 시작이야 '하고 긴장하고 있는데

딱 봐도 아가씨로 보이는 이쁜 처자가 내 거랑 같은 디자인 다른 색 수영복을 입고 맨 앞에 1번으로 서있는 거다.


먼저 알아본 아줌마들이

"어? 둘이 수영복 같은 거 아니야? 같네 같아.."


'에이 왜 하필.. 아이 그 아줌만 너무 요즘 걸 줬네. 그래.

젊어서 좋겠다. 이뻐서 좋겠다. '

부러움 반 질투반을 품고 웜업 운동을 시작했다.


"자 오늘 새로운 아줌마도 오고 했으니까 자유형 5바퀴로 시작하겠습니다. 자 시작!"


호루라기 소리에 1번부터 출발했다.


나도 새 수영복까지 입었겠다 이건 머 마음은 선수라도 된마냥 몸도 가볍고 '10바퀴도 돌지 머. '하고 발을 차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 이이이... 다 아아서엇바퀴이이이....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아차 싶었다.


'아참 나 수영 십수 년 만이지? 아참 나 체력 저질이지? 아참 나 숨만 쉬다 나온 거지? 아참 나 의사가 70대 노인 근육이라고 그랬었지?

하아 정말 죽겠는데.

비싼 수영복은 왜 이렇게 등을 죄는 거야? 아 어깨도 아프고 이발은 내발이 야머야? '


'나랑 같은 수영복 지지배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안 튀는데....

아 머야아 첫날부터...'


중간에 서고 싶은 맘을 간신히 참고 참아 5바퀴를 마쳤다.


물안경을 벗고 입에서 침인지 물인지 모르는 게 막 줄줄 흐르고 다리는 후들후들하는데,

1번 아가씨가 한 바퀴를 더 돌았는지 내 앞을 쓱 지나가면서


"얼굴 터질 것 같으세요. 괜찮으세요?"

하는 거다.


가까이 서보니 얼굴에 잡티도 없고 맨얼굴인데 이쁘기까지 하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상냥한지 진짜 내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건가?


그제야 양옆에 아줌마들이

"아이고 새댁 무리말어 첫날부터 무리하믄 수영 못한다. 쉬엄쉬엄해. "


그날 난 수영 마치고 집에 와서 애들 하교하는 시간까지 낮잠을 자고 팔다리가 아파서 저녁도 못 해먹이고 진통제를 먹고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수영을 아직까지 수년째 하고 있고

그 예쁜 1번 아가씨는 3달 정도 예쁘게 배우더니 그만두고 나갔다.

3년쯤 입을 줄 알았던 그 비싼 수영복은 6개월도 채 안돼 망가져서 못 입게 되었고 수영장 언니들을 잘 사귄덕택에 이젠 인터넷에서 싸고 질 좋은 수영복을 잘 찾아 살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웜업 수영 후에 얼굴은 터질 것 같고

그 노무 물안경 자국은 커피 한잔하고 집에 와서도 남아있다.

우리끼리는 물안경 자국으로 '내 피부가 좀 더 탱탱한가?' 지수로 삼는다.

물론 지난 연말에 한 건강검진 결과는 아직도 마른 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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