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웅식 Aug 11. 2023

검은 우물

9

황 노인이 혼자 걸어 보겠다고 해서 현수는 우두커니 서서 아버지를 봤다. 현수는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의 등과 걸음걸이를 바라봤다. 지난 추석 때, 아버지가 손녀의 손을 잡고 용눈이오름을 걸을 때가 생각났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아버지를 두드렸지만, 매일 운동을 열심히 했던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 없었다. 현수는 아버지의 걸음에서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았다. 황 노인은 손녀의 작은 보폭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기도 하고 손녀 앞으로 다가가 몸으로 바람을 막아주기도 했다. 손녀가 오름을 올라가는 걸 힘들어하자 황 노인은 손녀를 안고 걸어갔다. 갈대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거렸는데 황 노인은 손녀를 안고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오름을 올라가는 황 노인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현수는 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딸을 자신이 안겠다고 했지만 황 노인은 옛 생각이 난다며 손녀를 조금만 더 안고 걷겠다고 했다. 숨이 차면서도 손녀를 부둥켜안고 한 발씩 걸어가는 황 노인의 등 너머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수가 결혼한 지 9년 만에 생긴 아기를 황 노인이 처음 봤을 때 그는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셌다. 손자를 원했던 황 노인이지만 아들이 결혼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간신히 생긴 아이인지라 황 노인도 손녀를 귀하게 여겼다. 황 노인은 아들에게 빨리 나아서 손녀와 다시 오름을 걷고 싶다는 말을 종종 내뱉었다. 

 황 노인은 방귀가 나온다며 화장실로 갔다. 현수는 화장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도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좋게 나와야 한다고, 어머니 말처럼 저승사자가 아버지를 데려가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손녀 크는 걸 몇 년 더 봐야 한다는 말을 혼자 웅얼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황 노인은 아들에게 방귀 소리가 너무 컸고 방귀가 변기에 고인 물을 출렁거리게 했다고 했다. 화장실에 있는 사람은 다 들었을 거라고 농담도 했다. 배에 있는 수술 자국이 아물듯 황 노인은 수술하기 전의 걸음걸이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현수는 병실에서 황 노인에게 4‧3에 관해 물었다. 현수는 수술 당일 아버지가 불타는 집에 있었다며 소리를 질렀다고 하자 황 노인은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집에 있었는데 집이 불타버렸고, 다행히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을 안고 바닷가로 뛰어가서 자신은 살았다고 말했다. 황 노인은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현수가 그 말의 뜻이 뭐냐고 묻자, 황 노인은 제주도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어긴 14연대 군인들처럼 군인과 경찰이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강조했다. 황 노인은 떠올리기 싫은 일이라고, 어렸을 때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며, 그 이야기를 더는 꺼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전 08화 검은 우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