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나는 언젠가 그가 사용하는 펜 종류를 알려달라고 했다. 뜬금없는 질문에 아마도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그가 고집한다는 두 개의 브랜드와 펜 굵기를 찾아 네 개를 샀다. 내가 고른 펜을 종일 쥐고 공부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았다. 어차피 이데아로 머무를 인연이니까. 사 온 넉 자루에서 그가 쓸 펜과 똑같은 하나를 꺼내 내 것으로 삼았다. 내 펜으로 편지를 썼다. 쓰고 그에게 연락을 했다. 편지를 썼어요. 부쳐 줄까요, 만나서 전할까요. 그는 장난스레 주소를 흘리며 나중에 직접 주기를 원했다. 빨리 글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고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을 기다렸다. 어느 날 그는 미안하다는 연락을 해 왔다. 다시 만나지 않는 게 더 좋겠다고 했다. 그의 말은 완전했다. 완전히 옳은 말이었다. 단지 외면한 사실이었다. 어떤 존재가 그의 마음을 바꾸었을지, 아니 정신을 차리게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보다 합리적인 그의 결정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혹시라도 다가올 불행이 까마득했다.
그가 내 편지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나 했다. 혹은 나를 잊었나 했다. 생각해 보니 둘 다 아니다. 우선 그는 기억력이 좋을 게 분명하므로 여러 번 말한 사실을 잊을 리 없다. 그에게 나는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어떠한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나를 어느 정도 뜻깊게 생각했다고 어림잡아 헤아린다. 그는 나에게 사랑스럽다,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인지 인지하고 한 말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할 수도 있다. 그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기에 그런 형용사를 함부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랬던 그가 나를 잃을 리 없다. 내가 그에게 방해가 될 가능성을 인식했다는 사실, 그것으로 나는 그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통보는 아픈 동시에 달았다.
나는 그래서 어쩌면 영영 전하지 못할 편지를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는 이번에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선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읽을 수도 없는 편지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받는 사람이 되어 내가 오래전 썼던 편지를 꺼내 읽었다.
글이었다. 독자로서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신에 대한 나의 진심이 전해지는 편지였다.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그에게 전해지지 않는 이상 언젠가 그 종이는 찢겨 버려질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한 글을 썼다는 사실만은 찢을 수 없다. 편지를 쓸 때 사용했던 펜은 천천히 가끔 쓰고 있다. 끝이 뭉툭해 부드럽고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한, 꼭 그를 닮은 펜이다. 그가 추억이라면 나도 추억이다. 그와 나는 헤어질 수조차 없는 사이다. 헤어질 수 없다는 현실이 아프고 달다. 세 자루의 펜이 쓰이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 이 펜들은 그의 손과 만나지 못했으므로 이별을 경험할 수 없다. 끝까지 잉크를 소비한 뒤에 쓰레기통에 의미 없이 버려지는 편보다 나은 형편일까. 지금 쓰는 펜이 닳으면 나는 그 세 자루 중 하나를 꺼내 사용할 생각이다. 오랜 시간 동안 펜 하나도 다 쓰지 못했으니 네 자루를 전부 끝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넉 자루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가 이 펜과 만나지 못한다면 그때 그가 졸아들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써 없애 버리고 싶지만 펜을 쥘 일이 별로 없다. 그가 닳을 때까지 한참 걸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