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와 베르테르
가을이 불어왔다. 그녀가 살랑였다.
그가 한 모금 넘기고 나서 진술하듯 말했다.
“원래 술은 안 마시는데 같이 있고 싶어요.”
그의 연청색 남방 끝자락에 시원한 기대가 걸렸다. 그가 오른쪽에 앉은 그녀에게 시선을 건넸다. 파란 글씨에 하얀 띠를 두른 갈색 병이 기울어졌다. 그녀는 병 입구를 입술로 덮지 않고 휘파람을 불듯 틈을 주어 홀짝였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절반만 보였다. 동공 위에 가라앉은 속눈썹이 떨렸다. 그녀가 병을 내려놓고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이 구겨지며 웃었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하나로 묶은 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면 어떻게 될까, 그는 때 이른 취기를 느꼈다.
그가 건배를 제안했다. 투명하면서 단단한 유리는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모금을 남기고 그가 먼저 일어났다. 그녀는 다 마신 맥주병을 들고 따라 일어났다. 그가 달군 분위기에 그녀는 허우적거렸다. 그는 이름 모르는 그녀를 데리고 큰길로 나왔다. 초록색 풀밭에 둥둥 뜬 코스모스 꽃이 연분홍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풀밭으로 들어가 꽃잎을 하나 쥐었다.
“사진 찍어 주세요.”
그는 번호를 모르는 그녀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카메라 안에 들어왔다. 화면 안의 그녀는 실제로 보는 모습과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했다. 그는 카메라가 비추는 그녀의 웃음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떼어 낸 그녀의 일부를 가지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찍었다. 꽃밭의 기운이 그녀의 뺨에 물들었다.
“이름을 아직 안 여쭤봤네요.” 그녀가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말했다.
“우리 이름은 나중에 말하는 게 어때요?” 그가 물었다.
“그래요.”
“닉네임으로 부르기로 해요.”
“그럼 나는 사비나 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사비나?” 그가 되물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었어요?”
“옛날에요.”
“난 테레자 같은 사람이거든요. 가끔은 사비나 같은 삶을 꿈꾸기도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사비나.”
“그렇게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름으로 충분해요.”
“알았어요. 그럼 저는 베르테르로 불러 주세요.” 그가 말했다.
“베르테르? 가엾게 죽잖아요.”
“사비나도 언젠가 죽어요. 나도 베르테르도 사비나도 그쪽도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요.” 그가 코스모스 꽃잎을 하나 따며 말했다. 남은 일곱 개의 꽃잎이 가느다란 줄기에 달려 있었다.
“베르테르처럼 슬픈 사랑을 하고 싶어요?” 사비나가 물었다.
“사랑이 뭔지 몰라요.” 젊은 베르테르가 말했다.
사비나의 하얀 블라우스가 그의 음성에 따라 펄럭였다.
사비나와 베르테르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갔다. 베르테르가 코스모스를 줄기째 쥐고 왼쪽에서 걸었다. 사비나는 오른쪽에서 걷다가 베르테르를 불러 세웠다.
“사진 찍어 줄게요.” 사비나가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풍경이라도 찍어 봐요. 예쁘잖아요.”
“지금 찍고 있어요. 눈으로.” 베르테르가 사비나의 오목한 인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비나는 쏟아지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스며들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뒤에는 분홍빛 코스모스가 파도치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되었다.
그녀는 사비나가 된 후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이제 그녀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와ㅡ그의 일부인 베르테르와ㅡ함께 있을 때는 사비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를 이루던 진부한 고민과 지지부진한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르테르가 되어 나이를 잊었다.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숫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18세기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했다. 로테를 사랑했고 사랑해서 죽었다. 21세기 베르테르 앞에는 로테가 아닌 자유분방한 사비나가 있었다. 베르테르는 힘겨운 사랑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베르테르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구부려 그로부터 가까이 있는 왼쪽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걸었다. 두 손가락이 만나 고리가 생겼다.
“약속해요. 서로를 발가벗기지 않겠다고.” 베르테르가 사비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원하면 그렇게 해요. 확실히 정하는 게 좋죠.” 사비나가 답했다.
“제 말은 급하게 섞이려고 무리하지 말자는 거예요. 지금처럼 각자 위치에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서로에게 녹아드는 거죠.”
사비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왼손을 폈다. 벌어진 왼손 위로 오른손이 쏟아졌다. 사비나는 저절로 들어온 오른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각자의 세월이 새겨진 손금이 마주했다. 두 손바닥은 완전히 밀착하지 않았다. 낯선 체온을 감지한 베르테르가 꽃잎이 벌어지듯 손가락을 벌려 깍지를 꼈다. 마디와 마디가 교차한 매듭은 힘을 빼도 빠지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조금의 틈이 있었다.
베르테르는 흥얼거렸다. 사비나는 가사를 짓듯 말했다. 둘은 서로의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길을 걸었다. 저녁 시간이 지났지만 둘은 식사를 잊은 채 산책을 계속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던 코스모스가 길가에 떨어졌다. 꽃잎은 형태를 잃지 않은 채로 줄기 위에서 피어 있었다.
*다음의 두 작품에서 네 명의 인물을 빌렸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베르테르, 로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테레자, 사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