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넘치지 않을 만큼 흔들렸다

by 아륜

친구가 오늘 맥주 한잔하자고 했다. 시험기간이 2주 앞으로 다가왔는데. 나는 좋아, 선민아 하고 답했다. 마지막 수업이 다섯 시에 끝났다. 오늘까지만 놀고 내일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검은색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친구를 만나기에 괜찮아 보였다. 선민이 우리 학교 쪽으로 오기로 했다. 여기는 먹을 데도 없는데 내가 간다 하니 자기가 오겠다 했다. 일곱 시 약속까지 시간이 남았다. 공부를 할까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들떠서 무얼 할까 하다가 걷기 시작했다. 조금 덥기는 하지만 날씨가 좋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켰다. 꼭 들어봐 너가 좋아할 거야 하고 선민이 추천해 준 노래였다. 한 곡은 아니고 미국의 한 가수가 부른 여러 노래였다. 몇 년간 천천히 발표한 각기 다른 앨범의 노래들이었다. 발음이 끈적거려 가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사 보기를 누르자 문장이 움직였다. 후렴구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선민과는 한 달 만이다. 우리는 다섯 번을 만났다. 커피만 마신 적은 두 번, 밥 먹은 적은 두 번,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한 적이 한 번이었다. 처음으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선민은 어디까지나 친구의 범주에 들었다. 발전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지만 이상하게 더 나아갈 기미는 안 보였다. 나아가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좋았다. 우리 관계를 확실히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격의 없는 친구가 아니면서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선민뿐이었다.


어디쯤에 있어? 선민이 문자로 물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사십 분이나 남았다. 나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아까 들었던 노래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을 틀고 학교로부터 먼 곳으로 걸었다. 나 도착했어! 메시지가 또 도착했다. 답장을 보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어, 안녕? 여보세요 대신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 만에 하는 통화가 아닌 것 같았다. 반가움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 잠깐 산책했어. 알아보니까 갈 만한 곳 하나밖에 없더라. 그래 거기서 만나자.


맥주 마시기에 이른 시간 다른 손님이 없었다. 선민이 흰 셔츠에 회색 슬랙스 차림으로 왔다. 일찍 와서 머리 좀 잘랐어. 미용사가 만져 준 머리가 예뻐서 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너 오늘 소개팅 나가야겠는데? 멋있게 하고 왔어. 이 말은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난 생맥주, 너는? 나도. 모두의 약속처럼 짠 부딪히고 소리가 좋아 한 번 더 할까 말하며 조금 힘을 주어 또 부딪쳤다. 선민은 확실히 반가웠다. 만나서 기쁘고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잠깐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이 연락의 전부였다. 반갑다 친구야 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선민이 내 앞에서 말할 때 완전히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 모금을 핑계로 자주 잔을 부딪쳤다. 한 번에 길게 들이킬 수도 있지만 나누어 마셨다. 그렇게 짠 짠 짠 하는 게 좋았다. 취업 준비하는 선민의 표정이 바빠 보이지 않았다. 잘 못 마셔서 맥주도 술이라던 선민의 볼이 쉽게 붉어졌다.


선민이 더울 때 뿌려 하며 미스트를 건넸다. 선물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얼굴에 뿌려 보았다. 시원한 액체가 가뿐히 분사되었다. 너도 뿌려줄까 묻자 선민이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들키지 않을 만큼 바라보다 선민의 양쪽 뺨에 대고 한 번씩 힘을 주어 눌렀다. 눈을 뜨고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 선민에게 몇 번째일지 모를 건배를 제안했다. 맥주 거품이 투명한 잔 안에서 넘치지 않을 만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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