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미끄럼틀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 김경욱
비행기, 젊은 여자 배우, 여기에서 ‘어… 이거 김승옥인데…’라고 하자마자 비웃듯 ‘나’의 대사가 나온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인데, 그 소설 속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나죠.” (p.39)
나는 ‘어머… 정말 맞나봐.’ 하고 반가워한다. 이어 발견하는 문장.
“아,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코피를 흘려요.” (p. 39)
‘나’의 설명이 이어진다.
김승옥 중편소설 <서울의 달빛 0장>에 대한 내용이다. 빠져들어 읽은 작품을 여기서 또 만나다니. 안개가 자욱한 이야기들은 서로 닮았구나, 끌리는구나, 생각한다.
12쪽 뒤에서 ‘나’는 기형도의 시 <포도밭 묘지 1>을 읽는다.
스물아홉에 죽은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었다. 이 시집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포도밭이 나오기 때문이다. (p. 51)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을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p. 52)
소설가 김승옥, 시인 기형도를 좋아한다 해도 되겠지만 좋아한다는 표현보다는…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찌릿-한 적이 있다.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한 이 소설을 찌릿-하며 읽었다. 오랜만에 매료된 소설이었다. 소설이 몰입을 줄 때 나는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진다. 그렇게 미끄럼틀을 타는 순간 나는 어른들만 입장하는 놀이터의 아이가 되어 찰나이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이런 작품을 쓰는 재능과 성실의 에너지가 내가 사는 세상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황홀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때 나는 일일드라마를 발표하는 거실 TV의 훼방에도 가뿐히 소설 속으로 미끄러지며 삶을 사랑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트랙을 다 들어봐야지 하고 다짐하게 만드는 아티스트를 오늘 또 만났다. 소설가 김경욱이 무대에 올린 플레이 대부분을 아직 모른다. 아직이란 사실이 너무 즐겁다. 가끔 한 편씩 나의 놀이터로 데려올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