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기 자랑대회 7

계획 안 세우기

by 아륜

계획이 좋다. 할일을 설계하고 일정이 건축되는 과정을 즐긴다. 일찌감치 준비하고 만약을 대비하는 일은 내게 노동이 아니라 놀이다. 전략을 세우고 능력을 발휘하는 게임.


외할아버지댁에 가면 거실에 붓글씨로 오른쪽부터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나는 이 사자성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준비되면 걱정이 없다는 뜻.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계획이 다 있어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걱정을 더는 게 어딘가 하고 생각한다.


계획을 짜면 시간을 보낼 기준이 생기기에 버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계획과 다른 일이 벌어져도 웬만한 계획은 여럿 마련해둔 뒤라 당황하는 일이 드물다. 계획을 만들고 실행하는 습관을 나는 좋아했다.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면 여유가 있다. 계획은 성실하다, 꼼꼼하다, 책임감 있다, 이런 단어가 연상된다.


계획적인 성향에서 장점을 발견한다. 그 바닥에 혹시 불안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았다. 나는 계획을 안 하면 불안한가. 불안과 확신을 반대에 두고, 불안은 나와 거리가 먼 단어라 생각했다. 혹시 나는 불안할 틈을 허락하기에 불안한 나머지, 계획 없는 공백을 불안해하지 않나 싶다. 준비되면 걱정이 없는 게 아니라, 조금의 걱정도 제거하기 위해 준비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나의 계획성을 좋아한다. 혼자 계획해서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게 무슨 문제일까?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 나의 계획에는 사람이 껴 있다. 그러면 내가 의식적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압박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계획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인터뷰하듯 질문하고, 급하지 않고 때로는 취소되어도 괜찮은 일정에 굳이 미리 확정 예약을 해두려는 모습 등.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하다. 계획 없이 열어두고 싶지만 자꾸 준비하게 된다.


계획은 규칙이고 정해져 있다. 이제 세계에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제정책과 기상현상이 일어난다. 완벽한 계획보다 적절한 대처가 절실한 때다.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는 숨 막힐 수 있다. 준비해야 편하지만 계획대로 살면서 피곤하기도 하다. 매일의 과제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과 씻을 시간도 정해둔다.


재미있는 즉흥으로 가득한 사람을 좋아한다. 기분이 유동적이고 행동반경이 넓은 사람에게 나의 각진 세계는 신기한 동시에 답답할 수 있다.


이 글을 오래전부터 계획했는데 오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앞으로도 나는 계획 안 세우기를 못할 것이다. 시간이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가까이 느낀다. 원하는 대로 잘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렇지만 계획 변경도 잘하기로 다짐한다. 계획 안 세우기 대회에서 1등하는 사람에게 든든한 일정표와 이정표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