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못한 말

청혼

by 아륜

정우의 토요일은 오후 네 시까지 맥없이 지났다. 열 시 반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고 두 시에 피자를 시켜 먹었다. 그 사이 어제 쓰던 자기소개서를 수정하다 SF 영화 한 편을 봤다. 정우는 탄력 잃은 스프링이 지탱하는 슈퍼싱글침대에 엎드려 웹툰을 보고 있었다. 남자주인공의 찡그린 표정 위로 지현의 메시지가 떴다.


「야 나 결혼해 청첩장 줄게 만나자」


엄지로 대화창을 내리자 석 달 전 흔적이 보였다.

- 정우야 오늘 즐거웠어 또 보자

- 응 또 연락해


결혼.

청첩장.

결혼식.

웨딩드레스.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현.

그 옆에서 팔짱 낀 지현이를 감당할 어떤 남자.


호텔 창밖 야경.

나란히 선 와인잔.

가까이 새하얀 침대.

어쨌든 첫날밤.

다음날 긴 비행을 요하는 여행.

여행에서 돌아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한 남자를 위해 찌개를 끓이는 지현이의 주방.

그들의 안방.

침대.


정우는 아까 냉장고에 넣어 둔 콜라를 꺼냈다. 얼마 남지 않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 빈 페트병을 찌그러트렸다. 단둘이 만나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인가. 정우는 옷장에서 하얀 셔츠를 골랐다. 언젠가 지현의 취향을 물었을 때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좋다 하던 기억이 났다. 그 말을 듣고 엄마를 졸라 백화점에서 산 셔츠. 입을 일이 없어 과 선배 결혼식에서 한 번 입고 말았다. 바지는 검은 슬랙스를 받쳐 입었다. '그리고 밑에는 검은색! 검은 바지를 입는 거야. 어때? 정우야, 이 차림 잘 어울리겠다.' 지현의 말이 스쳤다. 여기에 검은 재킷만 걸치면 신랑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재킷을 입을 계절이 아니니 소매를 접어 올렸다. 신발은 가볍게 로퍼로 연출했다.


지하철을 탔다. 하나 남은 빈자리에 앉았다. 차가 덜컹거렸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정우는 가슴이 꽉 막혔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잡이를 잡고 중심을 잡았다. 정장 차림 키 큰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정우는 문 쪽으로 가 섰다. 까만 창에 비친 자신을 봤다. 지현을 만나러 가는 길 오늘이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출구로 나가 늘 만났던 카페 앞으로 갔다. 정우는 십 분 일찍 왔다. 번화가 사거리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누군가를 기다리고 만나고 떠들고 아플 운명이었다.


이십 분이 흘러 지현이 왔다. 지현은 팔을 높이 뻗어 흔들며 정우에게 다가왔다. 정우는 지현에게로 몇 발자국 걸었다. 파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지현은 정우가 왜 이렇게 멋있게 하고 왔는지 소란스럽게 물었다. 정우는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지현은 배고프다고 했다. 놀랐지 갑자기.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는 지현의 말에 정우는 웃고 말았다. 지현이 어깨동무를 하며 소주를 마시자고 했다. 정우가 어깨동무를 풀며 알겠다고 했다. 지현은 바로 어제 만난 듯 친근한 표정으로 다시 어깨동무를 걸었다.


둘은 실내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정우가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뭘 시킬지 물었다. 지현이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는 신부처럼 설렘 가득한 눈으로 오코노미야키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근데 지현아, 여기 오코노미야키가 없어. 정우가 말하자 지현은 큰 소리로 없다고? 되물었다. 몇 번을 투덜대는 지현을 보며 정우는 그럼 어떡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현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나가자 했다. 그래도 들어왔는데 어떻게 나가, 정우는 난처해하며 지현을 올려다봤다. 아직 주문도 안 했고 어차피 세팅도 안 되어 있잖아. 나가자, 지현은 정우의 팔을 잡아끌며 가게를 나왔다.


지현은 오코노미야키 맛집을 검색해 가장 유명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새로 찾은 집은 지현이 좋아할 만한 어둑한 분위기의 가게였다. 앉자마자 행복해, 지현이 말했다. 정우는 메뉴판의 음식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지현에게 자신 있게 건넸다.


정우야, 나 오늘 취하고 싶어. 너 맨날 취하잖아, 정우가 속으로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근데 너 잘 못 마시잖아. 그러면서 내가 술 먹자고 하면 매번 나온다. 힘들어하면서 먹는다. 지현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정우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지현의 앞에선 언제나 한계를 초과했다. 지현이 원하는 술이 나오고 정우는 가만히 잔을 채워 주었다. 지현은 정우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언제 또 마셔볼까 아쉬움을 흐린 채 지현이 잔을 들었다. 건배를 준비하는 사이 정우가 홀로 술잔을 비웠다.


왜 혼자 먹어. 같이 짠하고 축하해 줘야지. 누가 해줘.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지현이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밖에 없다면서 결혼하냐, 정우는 지현을 보고 답 없는 질문을 했다. 지금 아쉬워하는 거냐고 지현이 싱글거렸다. 석 달 전만 해도 아무 말 없었다. 정우가 탕에 숟가락을 담그며 갑작스러워 놀랐다고 답했다. 지현에게는 그때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너 얘기 안 했잖아, 정우가 물었다. 네가 안 물어봤잖아, 지현이 말했다. 정우는 건배나 하자며 지현에게 잔을 들어 보였다. 짠. 지현은 세게 잔을 부딪치고는 원샷을 했다.


지현이 좋아하는 요리가 나왔다. 들뜬 표정으로 지현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정우는 안주 대신 술을 삼켰다. 지현이 오코노미야키를 들며 정우에게 천천히 마시라 핀잔을 주었다. 정우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는 것 외에는 시집가는 친구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너 내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는지 안 물어봐? 지현이 물었다. 뻔하지 뭐, 정우는 생각했다. 그리고 빈 잔을 채웠다. 지현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정우는 병을 들어 하나 더 주문했다. 지현이 스스로 잔을 따랐다. 정우는 지현과 결혼할 사람이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현이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지만 눈앞의 지현은 혼자고 언제까지나 정우 앞에 이대로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남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싫었다. 뜬구름처럼 유유히 흘려보내고 싶었다. 짐작하기 싫었지만 짐작이 되었다. 네댓 살 위 사짜 직업에 좋은 차 몰고 시댁에서 해 준 브랜드 아파트에 부모님은 바로 승낙하셨겠지. 정우는 오코노미야키를 뒤적거리며 머릿속 추측을 밖으로 꺼냈다.


야. 네가 뭘 알아? 지현은 한꺼번에 잔을 비우고 이어 말했다. 네가 뭔데 그렇게 판단해? 정우는 작은 목소리로 화났어, 하며 떨었다. 웃음 짓던 지현이 언성을 높였다. 내가 나이 차이 나는 오빠 사귀는 거 봤어? 그리고. 사짜 직업이 나를 왜 만나? 좋은 차 없고. 관심도 없고. 돈을 왜 받아?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옆 테이블의 커플이 둘을 쳐다보았다. 지현이 찬물을 들이켰다. 지현의 부모는 처음부터 결혼을 승낙하지는 않았다.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을 데려왔을 때 부모는 지현에게 한참 설득을 당해야 했다. 왜 그리 결혼이 쉽냐고 정우가 물었다. 지현은 결혼하자고 해서,라고 짧게 답했다. 결혼하고 싶었다고, 할 나이가 됐다고.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들. 정우는 지현이 결혼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 나이를 떠올렸다.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많이들 결혼이란 걸 하는 나이. 정우는 몇 번째일지 모를 잔을 비웠다.


미안해, 지현아. 축하해. 놀라서 그랬어. 소주 그만 마셔. 맥주 마시자. 정우가 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지현은 자신의 큰 잔을 채우는 정우의 손을 가만히 보았다.


*


여름 특강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지현은 문자를 받았다.

- 우리 영화 보자


방학의 끝자락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지현은 정우를 만났다. 강의 전 스터디에서 같은 조로 알게 된 둘은 동갑내기 친구라 빠르게 친해졌다. 수업 전에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늘 학원 숙제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만났지만 마음은 데이트처럼 설렜다. 만날 구실을 잃은 후 정우는 용기를 내 연락을 했다. 지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을 하고 극장으로 나갔다. 개봉한 지 하루밖에 안 된 멜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지현의 선택이었다.


친구 사이는 커플석처럼 두 자리만 마련된 좌석에 멋쩍어하며 앉았다. 영화가 이십 분쯤 흐르고 목이 마르고 손에 쥘 간식도 없던 바로 그때 지현은 정우에게 귓속말했다.


우리… 손잡자.


지현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 정도 마음을 내밀었으면 된 거라 생각했다. 정우의 대답이 빠르게 돌아왔다.


왜…?


이후 지현은 영화에만 집중했다. 집중이 잘 되었다. 정우가 영화에 얼마큼 집중했는지는 정우만 알았다.


*


벌써 몇 년이 지났네, 지현이 말을 마쳤다. 정우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지현은 정우의 맥주잔을 절반쯤 채워 주었다. 어떻게 손을 잡아 갑자기. 나는 당황했지 그때. 정우의 잔은 차자마자 비워졌다. 지현은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들어 병째 마셨다. 정우는 병을 들고 있는 지현을 바라보았다.


“나 다 알아.”

지현이 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정우는 언젠가 지현을 만날 때 한수를 데리고 나왔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지현을 자랑하고 싶었다. 지현은 한 번도 정우의 것이 아니었지만 정우에게는 항상 단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한수는 가끔 지현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정우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약속을 잡는 일은 한수가 잘했다. 한수는 정우의 주문대로 어제 전화를 했다. 지현은 정우보다 한수에게 먼저 결혼 소식을 알렸다. 한수는 지현이 야속하고 친구가 딱했다. 어차피 말 못 할 정우를 대신해 친구의 오랜 이야기를 쏟아냈다. 지현은 말없이 정우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정우는 빈 병을 들어 맥주를 주문하고 그릇째 탕을 마셨다.

“너 왜 말 안 했어.” 지현이 말했다.

“야, 천만다행이지. 너 결혼하는데 혼란스럽게. 다 안다니 할 말이 없네.”

정우가 웃었다.

“바보야.”

지현이 반쯤 감긴 눈으로 말하고는 작은 잔을 맑게 채웠다. 정우도 치워 두었던 작은 잔을 꺼냈다.

“바보야.”

정우는 지현의 말을 따라 했다.

지현이 정우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정우는 가득 채운 잔을 들어 지현의 잔에 부딪쳤다.

짠! 우리 지현이 시집간다. 짠! 짠! 짠! 정우는 말갛게 웃어 보였다.


밤공기는 차갑지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둘은 걸었다. 지현은 정우에게 노래 연습을 하라고 했다. 축가는 네가 부를 거니까, 지현은 말했다. 정우가 꼭 해야 하냐고 물었다. 지현은 정우가 노래 부를 때 모습을 떠올리며 노을 청혼을 말했다.

“그 노래 알아?” 지현이 물었다.

“알지. 좋아하는 노래야. 가끔 불러.” 정우는 몇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

“진짜로? 근데 왜 노래방에서 한 번도 안 불렀어?”

“아껴뒀지.”


둘은 걸었다. 말없이 걸었다. 지현은 바닥을 보며 걸었다. 정우는 하늘을 보며 걸었다.

“축가 해달라고 했다고 진짜로 한다고 하냐. 청혼을. 너도 참…”

지현은 앞서 걸어갔다.

“결혼식은 언제야?”

정우가 뒤에서 물었다.

“내 정신 좀 봐. 청첩장 안 줬구나. 잠깐만.”

지현이 가방을 뒤져 하얀 봉투를 찾았다.

“다음에 줘. 아니, 내일 줘. 내일 또 만나.”

정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일?”

지현은 걸어가며 말했다. 정우의 답이 없었다. 지현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기다려.” 정우가 말했다.

“응?” 지현이 물었다.

정우가 입을 떼서 모양을 만들었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뭐 해. 나 먼저 간다.”

지현이 발걸음을 뗐다.

기다리란 말만 하면서…”

정우가 제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외면했죠 오랜 시간 조금 기다리면 그때가 올 거라고

정우가 노래를 시작했다.

“너 지금 길에서 뭐 해.” 지현이 물었다.


'그대 원하는 그 말을 다 알면서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알면서 이제야 말하네요. You don't have to cry 울지 말아요 고갤 들어봐요 이젠 웃어 봐요. I will make you smile 행복만 줄게요 언제나 그대 곁에서 영원히. Don't be afraid 모두 잘 될 거예요.'


정우는 1절만 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걸 왜 지금 불러… 왜 여기서 불러.” 지현이 말했다.

“나 어때? 잘했어?” 정우가 물었다.

지현이 정우에게 걸어가며 끄덕거렸다.

“평소에 불러 둬서 그런지 잘 나오네. 축가 해도 되겠어.”

정우가 발걸음을 떼며 말했다.

“목소리 좋다.”

지현이 웃었다.

또 불러 줄게. 내일 또 만나자. 정우가 속으로 말했다.


정우는 지현의 버스를 먼저 보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자리에 앉자 참았던 술기운이 올라왔다. 이어폰을 꺼내 축가 곡이 아닌 다른 곡을 틀었다. 노을의 하지 못한 말이었다.







*글 제목 '하지 못한 말'은 가수 노을의 <하지 못한 말> 노래 제목을 빌렸습니다.

굵은 글씨로 표기한 부분은 노을의 <청혼> 노래 제목과 가사를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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