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22.
봄날이 왔다는데 집구석(집 안)은 여전히 서늘하고, 봄기운은 냉이나 달래가 들어간 찌개나 국, 봄동이나 유채나물 같은 채소 반찬을 입 속에서 쩝쩝댈 때나 조금 느낀다. 입었던 겨울 옷 정리라도 해볼 요량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가 그냥 닫았다. 웃음이 났다. 겨우내 입고 나간 외출복이 거의 없다. 여러 해 반복이다.
봄날도 그러지 않겠나. 수년 동안, 좋아하는 백목련 꽃잎의 고운 자태 한번 보지 못했고, 짧은 수명 후 나다분하게 땅으로 떨어져 온통 너절했을 그것의 최후조차 단 한 번 목격하지 못했다.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고 누가 물었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건 사실이나 뚜렷한 목적 없는 외출은 칩거보다 더 괴롭다.
며칠 늘어져 지내보았다.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해대던 설거지도 식구들을 모두 내쫓고 느지막이 겨우 해내고, 청소도 하지 않은 채 커피도 한잔 들이켜 보고, 세수도 하지 않은 괴로운 몰골로 소파에 앉아 아침 드라마 시청도 해보고, 그랬더니 시간과 참 잘 섞인다. 이리 매일 지내면 하루가 짧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 그러나 지속할 만한 건 못 되겠다.
밥순이의 직업병인지 시도 때도 없이 밥 생각만 한다. 정오도 한참 먼 오전 시각인데 머릿속은 저녁 찬과 내일의 아침을 고심한다. 결국은 오래 널브러져 있지도 못하고 일어나 창을 열고 청소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은 빼어나게 단순해졌다. 머릿속만큼이나 몸뚱이의 움직임도 뻔해졌다.
밥!
명료하게 이 한 가지에 따라 심신이 흐른다. 명색이 고3 어미인데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다. 밥하는 것만 신경이 쓰일 뿐. 물론 정작 고3인 그 넘도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진 않다. 외려 타인들이 걱정을 한다, 힘들겠다고. 조금 더 있어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진 별반 다를 게 없다. 불량 엄마라 그런가 싶기도 하다. 정보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그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건 밥뿐이다. 근데 그것마저 성가셔서 큰 녀석이 학교에서 석식을 먹고 야간자습을 해야 한다는 그 말이 어찌나 반갑고 기쁜지 모르겠다. 한시적이라곤 하지만 어쨌건 한 달여 저녁 한 끼는 어린이와 단출한 식단으로 차려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밥 때문에 일찍 깨고 밥 때문에 일찍 자려 애쓰고 밥 때문에 머리가 지끈대고 밥 때문에 즐겁기도 하고. 하여간 이 눔의 '밥'이 문제다. 주말이면 더 골치 아니던가. 꼬박 세 끼를 챙겨야 하는 날이면 그때는 미쳐 죽는다. 어쩌다 두 끼로 줄면 마음이 그리도 가붓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내내 밥만 생각한다고 하면 성찬을 차려내는 줄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아닌 것을 밥하는 여인들은 잘 알 테다.
사실 음식 하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어쩌면 기꺼이 즐길 수도 있었을 테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 한때는 꽤나 즐기기도 했었다. 늘 숨 쉬듯 해야 하는 것이라 조금 지루하고, 잘하든 못하든 일단 목구멍으로 넘기면 똑같은 것이 되기에 때로 덧없고, 밥순이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 왔지만, 점점 지친다.
서너 해 전부터 겪고 있는 여러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매사 짜증이 나고 의욕이 없다. 그럼에도 밥은 해야 한다. 나름의 강박인지, 알량한 자존심인지 분간하려들 것도 없다. 밥이니까. 오래전에는 밥도 하고 글도 쓰고, 밥도 하고 사진도 찍고, 책도 읽고 밥도 하고, 커피도 배우고 밥도 하고 하여간 이것저것 한꺼번에 할 수도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밥만 한다.
날이 갈수록 몸과 맘이 점점 사람살이를 버거워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해마다 찰나의 봄날을 풍장 하듯 보냈는데 올봄도 마찬가지지 싶다. 아직 내복을 벗지 못하고 그 위로 여섯 겹의 옷을 걸치고도 한기를 느끼는 나는 영원히 겨울 안에 갇혀 있게 되는 건 아닐까, 도 싶다. 그래도 밥은 한다.
밥! 이 안에 영원히 갇혀 있고 싶지는 않은데.
어쨌건 내일은 달래 넣은 된장국을 끓이고, 마트에서 겁나게 작은 넘으로 싸게 산 굴비 반 두름도 굽고 얇게 썬 돼지고기를 튀기지 않고 구워 만든, 오늘 저녁에 어린이와 함께 먹은 깐풍육 남은 것도 내놓고, 김 몇 장 올리고, 멸치 무침이랑 시금치와 김치를 올려놓으면 얼추 주말 아침상은 차리겠다. 큰 넘이 좋아하는 톳 무침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인터넷으로 장을 본 찬거리들이 냉장고를 살찌워놔서 내 의지만 용케 버텨준다면 세 끼 내는 것도 문제는 없겠다. 그래도 주말엔 인간적으로 두 끼만, 한 끼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자.
찬란한 봄날이 오면 좋겠다. 놓치지 않고 제대로 잡고 싶은, 밥에서 풀려난 봄날! 하여간 어쨌건 아무튼, 봄날은 왔다는데 가을 같은 이 적막감은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 때문인가. 간만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너무 춥다. 후딱 자야겠다. 그래야 밥을 하지.
그토록 오래 밥만 생각하던 내가 언젠가부터 밥의 사슬에서 풀려났는데도 그다지 달라진 것도, 달가운 것도 없다. 밥이 아닌 얼어붙은 봄날이 문제였던 듯. 밥만 떠올리던 그때가 지금보단 외려 덜 막막하지 않았을까. 내게 찬란한 봄날은 어떤 의미인지. 오래도록 갈망했지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상냥하고, 찬란한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