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취할 시간이다

2014.12.31.

by 백경


간밤 자꾸 휘도는 머리를 한 곳에 기댄 채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초점 잡히지 않는 눈을 손등으로 몇 번 야무지게 훔치고 안약도 넣어보지만 그다지 시야가 맑게 들어오진 않는다.


<안나 카레니나> 어릴 때 건성건성 읽은, 톨스토이의 연애소설 정도로만 기억되는 책이다. 두툼한 두께로 무려 세 권씩이나 된다. 아직 첫 권의 마지막 -한창 더울 때 본 <리스본의 겨울>도 아직 마지막은 읽지 못했다- 을 덮지 못했다. 가을이 익을 무렵 겨우 펼친 책을 몇 달에 걸쳐 읽고 있다.


가을 몇몇 날엔 읽는 속도가 제법 빨랐었다. 남녀 간의 사랑, 그것도 불륜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어렴풋한 기억으론 비극으로 끝나는 그 사랑의 결말 때문인지 큰 감흥은 없었으나 다른 소설보다는 빠르게 읽힌 셈이다. 인간의 여러 복잡한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농촌 문제 등 사회 구조에 관한 톨스토이의 의식이 투영된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 고민할 여유(감정) 없이 그냥 무작정 읽는다. 적어도 두 번 이상 반복해 읽으면 글에 녹아있는 작가의 신념을 알 수 있을까, 모르겠다. 불면의 밤이었으나 생각보다 많이 읽히진 않았다.


책을 덮고, 찰나 같은 아주 짧은 꿈을 여럿 꾸고 몽롱한 정신으로 허영거리며 아침을 맞고, 감자를 깎다 칼에 찍히고, 넋 나간 사람처럼 맥없이 수프를 끓이고, 표정 없이 식탁 앞에 앉아 뜨거운 수프를 입 속으로 거푸 넣었다. 내 영혼 없는 몸짓은 긴 권태와 체념의 부스러기다.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무엇에든 취하라, 몇 해 전 읽은 <파리의 우울>에서 보들레르가 그랬던가. 취기가 줄거나 사라지면 스치는 바람이든 물결이든 시계든 어떤 것에든 물어보라 했던가, 지금이 몇 시인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시계도 모두 내게 답한다 했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라고.


그래서 그토록 나는 무엇에든 취하고 싶었던가.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취하라 했으나 내 지난 세월은 쉴 새 없는 시간의 노예로 살았다. 시간 안에 갇혀 견디는 힘만 키웠다. 쓸데없이 맷집만 길렀다. 술에 취할 수도 시에 취할 수도 덕에 취할 수도 없는 나는 도무지 무엇에 취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람은, 물결은, 시계는 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취해야 한다.






책은 해를 넘겨 겨우 다 읽긴 했으나 톨스토이의 신념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조금 우울했을 뿐.




매거진의 이전글냉정과 우울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