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쓸쓸하지만, 좋다

2017.8.31.

by 백경


현실의 '나'는 내가 만든 틀 안에서만 맴돌면서 늘 틀 바깥의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쉽사리 안주하지 못한 채 현실의 고난과 매번 부딪친다. 내 안의 많은 것은 바깥에서만 웃을 수 있는 것들인가.


속이 거북한 듯해서 간밤엔 맥주 한 캔을 감자칩과 함께 넘겼다. 한밤이라 더 부대낄 줄 알았는데 외려 좀 살 것 같았다. 그냥 몸속에 알코올이 필요했던 것. 맥주가 떨어졌다. 남자에게 부탁했는데 잊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어제는 거의 반나절 만에 25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었다. 그제 읽은 것과 합하면 500 페이지가 넘는다. 근래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껏 서른 페이지 남짓을 이틀에 걸쳐 읽은 적도 있는데, 리얼리 언빌리버블이다. 결국 이틀에 걸쳐 겨우 책 두 권을 읽은 셈인데 다독하는 이들이 보면 코웃음 칠 일이다. 어쨌건 책이 잘 안 읽히는 시절을 보내는 내겐 호들갑스러울 만한 일임엔 틀림없다.


몽테뉴 <에세>의 완역본을 찾았지만 찾기도 어려웠고 엇비슷한 책을 고르긴 했는데 리뷰들마다 죄다 번역이 그지깽깽이 같다는 한결같은 내용이었다. 아주 오래전 문고판으로 짧게 읽은 탓에 시식 코너만 훑은 듯 아쉽기만 했었다. 몇 해 전 <카프카의 서재>의 저자께서 추천해준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는 몽테뉴 정신세계를 12가지 고민들로 풀어놓았는데 꽤 읽을 만했다. 가끔 마음이 소란할 때 다시 꺼내 들기도 했었다. 이번엔 뭔가 전투적 몰입을 갈망했는지 방대한 분량의 책을 찾고 있었는데 번역이 죄다 그렇고 그렇다는 거였다. 겨우 검색해 다시 한 권을 용케 발견하긴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도 관계의 본질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고가 브랜드 에르메스의 광고 카피였던가. 겉치장을 벗어버린 단순한 그것, 근원적인 목적. 거기에 더 가치를 둔다는 의미이겠다. 가족, 연인, 친구, 직장동료, 그들 각각의 관계에서 본질의 그것만을 추구한다면 충돌은 한결 덜할 것이다. 본질을 흐리는 다른 것이 끼어들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조금 안다는 것이 앞으로 더 알 수 있는 많은 것을 가린다', 어느 책에서 본 글귀이다. 맘에 훅 들어온다. 그래서 난 1도 아는 게 없다.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과는 확실히 다르다. 몸뚱이로 스며들어 괴롭히는 바람도 전보다 더디게 빠져나가며 아주 천천히 날 애먹인다. 살갗이 요구하는 수분이 갈수록 많아지는 걸 보니 확실히 가을에 접어들긴 한 모양이다. 거실 창밖 대추나무에는 벌써 연둣빛 대추가 조랑조랑 많이도 열렸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의 찬바람을 피해 다녀야만 하는 몸은 정말이지 힘들다. 몸 구석구석 바람이 자리잡으면 꼼짝없이 뜨거운 화로가 되어 앓아야만 선심 쓰듯 겨우 빠져나가 주는 바람.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괴로움을 어지간히도 많이 지니고 있는 몸이다. 찬바람은 싫지만, 그래도 가을이 빨리 오면 좋겠다.


노화의 가장 불편한 점을 한 가지 들라고 하면 단연 '눈'이다. 눈 때문에 책을 읽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결핍의 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