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잘 버티기

2016.11.28.

by 백경


2주 전 다시 찾은 병원에선 딱히 주의점을 얘기해주지 않았다. 시술 후 당장은 커피도 안 된다 술도 안 된다 즙도 안 된다... 가지가지 제약도 많더만. 두통과 불면, 어눌한 말과 순간순간 잃어버리는 기억 등을 주치의 샘께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물어본 건 딱 하나였다.



선생님, 저어... 혹시... 맥주 마셔도 되나요? 어이없어하는 의사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걸렸다. 네, 괜찮습니다, 라는 답을 듣고선 헤벌어지게 웃고 돌아서 나왔다. 6개월치의 약을 한 가방 가득 받아 들고도 맥주를 허한다는 그 말에 좋아라 내내 웃기만 했다. 내년 늦은 봄 다시 병원을 찾아 재검을 받아야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 기념으로 이틀 정도 맥주를 마셔보았다. 마실 땐 욕망을 이룬 듯 짜릿했으나 다음 날 아침은 머리가 무겁고 아팠다.



첫눈이 오던 그날, 어둠은 까무러쳐 소리도 없고 기척 없는 시간 위를 구겨진 하루가 다리를 뻗어 눕고 어제를 더듬거리며 바닥을 기던 희미한 그리움이 그 곁을 맴도는데 뒤놀기만 하던 세월의 그림자가 희뿌연 기억 속을 하염없이 휘젓는 순간 이별의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 청춘의 거울 속을 초췌하고 어슴푸레한 오늘의 얼굴이 슬프게 떠다니더라.


가끔 우울하고 자주 우울하다. 가끔 웃고 자주 웃는다. 잘 견디고 잘 살고 있다.






어제는 몹시 술이 먹고 싶었다. 알코올을 입에 못 댄 지 4년째다. 커피도 겨우 올해부터 아주 연하게 마시고 있는데 술은 여전히 조금 두렵다. 소금을 거의 먹지 않아야 하지만 적당히 먹고 있고, 커피도 마찬가지지만 참는 게 더 스트레스일 듯해 조금씩 시도하는데, 알코올은 당최 어렵다.


굳이 일부러 먹을 일은 없겠지만 가끔은 어제처럼 술이 고픈 날이 있다. 속이 안 좋아 며칠을 고생하면서도 뇌는 아랑곳없이 엉뚱한 욕구를 드러내게 한다. 뇌 오작동이 심한 상태를 견디는 중이다.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고 의사는 말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음의 문제가 아닌 뇌의 예민함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 오래 누적된 불면과 여러 문제점을 안은 몸의 반응이 뇌를 점점 예민하게 만들었고, 그것으로 비롯된 뇌의 잘못된 판단과 지시. 내가 겪는(겪은) 많은 이상한 증상이 어느 순간부터는 뇌의 오작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의아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되돌아보면 참 숱하게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었다. 심리적인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내 질환의 뿌리는 생동할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던 게 확실하다. 십수 년을 생동하려 아등거렸으나 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그것을 깨고 나아가야 할 때라는 걸,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신이 없고, 주눅이 풀리지 않는다. 습관처럼 나는 또 언저리만을 맴돌고 있다. 차라리 강제로라도 경계 밖으로 내몰아줬으면 싶다. 생각은 자꾸 흩어지고 마음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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