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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 Feb 22. 2017

3월, 할머니가 죽었다

장례식장에서의 단상

그대로 멈춰있었다. 어제까지 눈을 껌뻑거리던 외할머니가 이제 눈꺼풀을 들어올릴 의지도 힘도 없다는 듯 축 늘어져 계셨다. 


엄마를 잃은 엄마는 엉엉 울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는 놀이말에 잠깐 순응했거니 한 엄마. 하지만 곧 할머니가 자신의 뇌파로 오른 검지를 까딱거릴 수 있을 거라 여긴 자신의 생각이 오류임을 깨달은 듯 했다. 운구가 화장터로 들어갈 때까지 무료 개장한 롯데월드에서 엄마 손을 놓힌 아이처럼 엄마는 엄마를 부르며 넉놓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떨리던 몸이 조금씩 흔들림을 멈추는 듯 했다.




화장한 할머니의 운구 받침대에 두개의 쇳덩이가 나왔다. 금니 하나와 연골 대신 고정을 시키기 위해 그녀의 무릎에 넣어두었던 쇠. 그 쇠들은 그 어마무시하게 뜨거운 불에서 형태를 존속했지만 나머지 살덩이들은 두 손바닥 붙여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재가 되었다. 165센티의 인간이 손바닥만한 항아리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은회색을 띈 그 물질을 멍하니 보았다. 움직이기도 하고 쭈글어들기도 하던 그 육체와 뼈와 근육과 신경이 가루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터였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움직일 수 없게 변한 자를 흙속에 묻었다. 움직인다는 것의 우주적 의미. 산자와 죽은자의 희비는 흙을 경계로 갈렸다. 


반드시 죽는다. 꽃이든, 사람이든. 영원할 수는 없다.

다만 순환이 있다. 꽃이 지고 싸늘해진 꽃자리에 다시 꽃봉우리가 얼굴을 내민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자신의 아들, 딸을 자신의 키만큼 키워내기도 한다. 죽어가는 줄 알았던 나무에 새 줄기가 나고 말라버린 땅위에 어느 날 풀이 솟는다. 생명의 힘이다. 푸르른 봄의 축복이다. 




우리는 늘 푸르른 청춘이길 원하지만 시간은 종종 그 바램을 무시한다. 학창시절은 신호등 패턴처럼 지루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변화에 허덕인다. 행복과 불행의 줄다리기를 하며 수 십년 견디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려드는 사건이 덤덤해 졌을 때 우리는 허무함을 느낄 것이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옆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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