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쓰는 제자

by 백권필





산울림


산의 허리엔 여러 生들의 흔적이 있다

고추냉이 밭이랑 일구며 홀로

삼남매를 키워낸 할머니의 굽은 허리

세월의 무게에 점점 낮아만 지던 산

바스락 마른 손 같은 잎

눈물로 떨구며 진동하던 산

산이 무너졌다

할머니가 굽은 허리를 곧게 펴고

산에 묻히시던 날

삼남매의,

사람들의 소리에 산도 울었다.




인연의 시작


교사 생활한 지도 벌써 열 번째 접어들었지만 딱히 연락하고 지내는 제자는 별로 없던 것 같다. 최근에 고3 담임을 하면서 졸업생들과 연락이 빈번해졌지만 제자와의 애틋한 관계가 어색하게 느끼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어색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는 제자 하나가 있다. 지금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데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제자를 두었다는 행복감을 가끔씩 느끼기도 하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한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기에 학생이라는 느낌보다는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라는 생각이 들어 친구라고 여기고 있다.


제자와의 만남은 2004년 고1 담임을 했을 때이다. 아니 2002년 중학교에 있을 때 국어교과 선생님과 지도 학생으로의 만남이 더 정확할 것이다. 1학기 때는 내가 잠시 근무했던 중학교를 졸업한 출신이라는 친근감만 있을 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학생이었다. 그렇게 1학기를 보내고 방학이 되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갈 무렵, 병원에 가야 한다는 제자 말에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난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서는 고칠 수 없어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병일까? 그래도 서울로 가면 고칠 수 있겠지 생각했다. 다시 제자 어머니의 전화를 통해 전해 오는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차가운 물질을 만지면 손에 마비증세가 온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흐느껴 울며 전화하시는 제자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드려야 할지 난 난감하였다. 일찍 남편을 잃고 자식들을 바라보며 살아오신 어머니에게 또다시 닥쳐온 불행을 생각하면 나도 눈물이 나왔다. 고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아들의 병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족이 아프다는 것, 그것도 부모나 자식이 아프다는 것은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이다. 제자 어머니의 소망을 들어주신 것일까. 약을 먹고 손을 따뜻하게 하면 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전하는 제자 어머니의 목소리는 한층 밝아 보였다. 나 역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은 2학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2학기에 제자는 반장선거에 나와 당당히 투표로 반장으로 선출되면서 나와 가까워졌다. 반장이라는 직책에 대해 설명하고 학급에서 해야 할 일을 지시하며 자주 만나게 되면서 나는 제자의 여러 가지 모습을 차츰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사는 가정환경이었지만 늘 밝은 모습을 간직했고 매우 성실히 생활하는 제자였다. 2004년 1년간의 제자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늘 그랬듯이 학년이 달라지면 서로 멀어지게 마련이니까.





종이컵


새벽 2시

벌써 두 잔이나 커피를 마신 종이컵이

시린 스탠드 불빛 아래

꾸벅꾸벅 졸고 있어요

꽃이 피고 별이 뜨는 연습장엔

석류알 같은 꿈들 빼곡히 새겨져요

저는 꿈을 꾸고 있어요

주름 따윈 두렵지 않아

구겨져도 다시 펼 수 있는

꿈을 꾸고 있어요

절대로 절대로 깨지지 않을

종이컵 같은,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마음속의 샘을 퍼 올려

목마른 사람의 목을 적시는 종이컵,

저는 시인이 될 거예요.





인연의 연속


2006년 나는 1학년 담임을 맡았기에 제자와는 인연은 잠시 스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시 시작된 제자와의 인연은 시(詩)로 다시 이어졌다. 1학년 때 출전한 지역 주최 백일장 대회에서 입상한 후 제자는 꾸준히 각종 백일장 문예대회에 참가하고 도전하는 과정에 나에게 자주 문의를 했고 나는 제자의 질문에 나름대로 성실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였을까. 우리의 관계는 비록 담임과 학생도 아니고 담당 지도 교과교사와 학생도 아니었지만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제자를 따뜻한 말로 위로해 줄 수 있었던 난 매우 행복했었고 뿌듯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 해지는 관계를 희미하나마 느끼게 되었다. 고3이 되자 입시 준비로 바빠진 제자는 주말이면 전국의 백일장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아쉽게도 장려상 또는 가작으로만 입상하여 나는 늘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2006년 5월 6일 세종날기념 제31회 한글 글짓기 대회에서 고등부 으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난 너무 기뻤다.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7~8번의 지원 끝에 2학기 수시로 경기도의 S대학교 국어국문과에 문학특기자전형으로 합격하였다. 인터넷에서 만나 시를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에 비하면 결코 좋은 성적은 아니었기에 제자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졸업 후, 제자가 학교에 찾아왔을 때 대학교 생활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하던 시도 많이 쓰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 좋아하는 사람은 함께 시를 공부하던 여학생이었던 같다. 그리고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제자는 시를 오래도록 쓰고 싶은 데 그것이 미래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시를 계속 쓰기 위해서는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교직이수를 하기를 권했다. 제자는 매우 긍정적이 반응을 보였고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약속대로 제자는 1학년 성적이 우수하다고 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2학년이 된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행복한 상상을 한다. 몇 년 뒤 교생이 되어 나를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대나무

- 나 -


1.

관절 없는 대나무는

어렸을 적,

수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조그마한 집, 비좁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른

나무들과 부대끼며

성을 낸 적도 있을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바라보다 대나무들

한데 의지해 흔들리고

있음을 안다 바람은

모든 대나무의 부드러운 살결


2.

사춘기를 마악 지나고

스무 번째 곧은

마디를 갖은 나,

대숲 바라보며 서있다


한 차례 거센 바람이 지난 뒤.






인연의 마무리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이어질까? 저 사람과 나는 무슨 이유로 만나고 헤어질까?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전생의 업(業)때문일까? 비록 만남은 우연이거나 운명일지 모르지만 인연의 끈은 서로의 노력으로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만이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오래갈 수 있게 한다고 확신한다. 이번 방학에 제자가 오면 술이나 한 잔 기울이고 싶다. 아니 제자와 함께 시를 한 수 읊고 싶다.




이 글은 오래전에 쓴 글로 응모했는데 실렸던 글이다.

글에 나오는 시 ‘산울림’, ‘종이컵’, ‘대나무’는 제자가 고등학교 때 참가한 문예대회에서 입상한 시다. 현재 제자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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