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가 한창이다. 길가에 들판에, 눈 닿는 곳 어디나 안개꽃처럼 널렸다. 다 와서 길이 막힌다. 차창 너머로 브레이크 등이 파도처럼 너울댄다. 월요일 아침부터 면사무소 주차장이 만원이다. 앞차가 길가 주유소로 방향을 돌린다. 차 안에서 멍청히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 나을 게다. 망설임은 잠깐 나도 운전대를 꺾어 방향을 튼다. 주유소 한쪽 외진 구석에 차를 세우고 바로 옆 건물 주민센터를 향해 느릿느릿 걷는다. 우중충한 하늘, 비가 오려나.
기록상으로는 1980년대 초반이었다. 콩밭 매는 칠갑산 아낙이 등장하기 한참 전, 충청도 오지의 군청 소재지 한 곳이 경상도 청송과 영양의 처음과 끝 두 글자를 따온 고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풍수가의 말을 빌리면, 청양이 산세는 높지 않으나 골이 깊고 험해 드센 인물이 많이 날 곳이라 했다. 이념으로나 정치적으로 강성인 유학자나 정치인들이 많다. 난 충청도에서도 가장 오지라는 청양에서 태어나 십 대 초반까지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다.
엄마 친정은 예산이다. 청양고추만큼이나 유명한 구기자 마을이며 두 곳은 작은 실개천을 경계로 서너 집 건너 일가에 친척이 수두룩하다. 수더분하다거나 인심 좋다기 전에 좋게좋게 지낼 수밖에 없는 인적구성이다. 그류~, 알간~ 몰러유~ 등 축 늘어지는 말투 속에는 상황에 따른 충청도 사람의 속내가 담겨 있다. 무심한 듯 어리숙한 듯 툭툭 던지는 그 어휘들이 칭찬인지 욕인지 다른 지역 사람들은 파악하기 어렵다. 엄마는 달랐다. 워낙 직설적이었다.
엄마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외할머니가 오셨다. 어린 나이에 생모의 사랑이 끊겼기 때문인지 그때부터 엄마의 태도는 무척 까탈스러웠다고 전한다. 훗날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까칠한 엄마 눈치를 살피느라 외가 쪽이 힘들어했다. 외삼촌과 이모들이 손위 누님이자 언니를 얼마나 버거워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버지께서 그 서먹한 관계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 많이 쓰셨다.
엄마가 살아온 시절은 거칠다. 그 시대 누구라도 그랬을 테지만 엄한 일제의 순사 시대와 해방, 한국전쟁, 군사 쿠데타를 거쳐 6~70년 대의 경제적 도약기와 80년의 봄까지 근대사의 부침 속에서 고단한 삶이 계속되었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신 90년대 초반에 치매라는 놈이 엄마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엄마의 설움, 허기와 갈증까지 흐려가는 엄마의 기억과 함께 없어지기를 바랐었다.
내가 틀렸다. 치매 발병 초기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던 엄마의 상태는 주변 사람들을 되레 황당하게 만들었다. 음식 간을 맞추지 못하는 단계는 시작에 불과했다.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때가 되어 배가 고파도 끼니 챙길 생각을 못 했다. 지갑 속의 당신 돈을 훔쳐 간 나쁜 애들이라며 누이와 형님에게 눈을 흘겼고, 진찰을 받아보자는 우리에게 자기를 미친 할망구 취급한다며 노발대발을 넘어 적개심까지 드러내기 일쑤였다.
요양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엄마가 스스로 선언하셨다. 거기 친구삼을 만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예상한 대로 요양원 안의 다른 어르신들과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엄마는 그냥저냥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흐려졌고 근력도 약해져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큰아들은 종종 시동생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엄마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줄더니 나중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병약한 엄마는 코로나에 걸렸고 힘겹게 2년이 지났다. 한밤이나 새벽에 예고 없이 날아오는 전화나 문자를 수없이 받은 형제들 맘고생이 컸다. 헐레벌떡 내려가 보면 자식으로서 반대하기 어려운 생명 연장조치를 받아 의식이 돌아온 엄마가 초점 없는 두 눈을 아기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얘기가 진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는 엄마의 연명치료 중단을 모의했다. 동의서 서명이라는 부담은 형님이 맡았다.
사나흘 후 엄마는 먼 곳으로 떠나셨다. 백 살은 거뜬히 사실 것 같던 엄마, 괄괄한 성정과 거침없는 언사로 집안 전체를 흔들고 우리를 가슴을 조이게 만들던 그분도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모가지가 부러져도 아닌 것은 절대 아니라던 아버지가 왜 엄마한테만은 한없이 너그러웠던지. 엄마의 허물을 묵묵하게 덮어주던 아버지의 넉넉함을 반만큼만 따와서 이해하고 받아줄 것을. 미안해요, 엄마.
어미마저 잃은 고아라 나를 불쌍히 여겼을까, 주민센터 직원이 오늘따라 훨씬 친절하다. 출생과 사망 연도 등등, 95년 인생이 단 몇 분 만에 몇 줄로 정리되었다. 엄마는 평소 줄기차게 주장하셨다. 부자에다 집안 좋고 배움이 많은들 죽으면 옷 한 벌과 노잣돈 몇 푼만 가져가게 된다고. 신세 한탄이었든 희망 사항이었든, 엄마는 그렇게 가셨고 이제는 남은 우리가 삶을 이어간다. 죽음을 ‘끝’보다는 커다란 틀 속의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유다.
올 장마는 긴 가뭄 끝에 더디 와서 삼사일 만에 짧게 끝났다. 내년에도 이 장마를 만나볼 수 있을지, 영원히 옆에 있을 듯했으나 한순간에 사라지는 숱한 존재들, 끝나면 그저 아쉬운 인연들... 잿빛 하늘, 거센 비바람과 불쾌한 후덥지근함까지 내 앞의 매 순간을 기꺼이 맞을 일이다. 로마인 호라티우스의 시 한 구절처럼 확실치 않은 내일보다 당장 살아 숨 쉬는 지금 이곳에서. 세찬 비를 흠뻑 맞은 개망초 때깔이 싱싱하다. 늦가을까지 진창 피고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