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by 문예반장

바위산 골짝에 아침저녁으로 살얼음이 덮인다. 애장골 빽빽한 나무 사이로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보여도 구봉산 넘어온 바람은 온기를 품었고, 따뜻해진 구름이 나직한 비가 되어 세상을 적신다. 시냇물이 불어나 시끄럽다. 들판에 파란 쑥이 돋고 긴 겨울 숨죽인 매화도 연분홍 봉오리를 내밀었다. 겨울잠 덜 깬 개구리까지 서둘러 튀어나와 어리바리 헤맨다.

물오른 갯버들은 뽀얀 솜털을 게워내고 성질 급한 개나리 덕에 세상이 환해졌다. 앞산 중턱 진달래도 며칠이면 발개지겠다. 겨우내 바짝 말랐던 논바닥으로 물이 든다. 누렁소가 커다란 눈을 껌벅대며 쟁기를 끈다. 기운이 부치는지 헤 벌린 입에서 허연 침이 흘러내리다 콧김에 쓸려 풀풀 날린다. 손에 고삐를 거머쥔 동네 아저씨도 힘 달리기는 똑같다. ‘워워' 소리가 안쓰럽다. 얼마 안 있어 학교 가는 길에 쌀낭구가 파릇하겠다.

등짝에 책보를 동여맨 아이들이 논두렁을 내달린다. 허겁지겁 도망가는 개구리가 발짝에 깔리거나 말거나 이런 놀이는 재미있다. 퍼져가는 동그라미 위에서 덩달아 튀는 소금쟁이, 거머리와 초록 물뱀까지 제 세상을 만났다. 며칠 밤 개구리 울음소리 시끄럽더니 시냇물과 논바닥 검불 주변에 미끈거리는 개구리 알이 득실득실하다. 며칠 지나면 배불뚝이 올챙이가 꼬물꼬물 헤엄치겠다.

나지막한 비탈길로 올라선다. 하늘 높은 곳에서 망을 보던 종다리가 쌕쌕이처럼 빠르게 고꾸라져 내려온다. 저러다 땅 위에 머리 꼬나박을라. 뻐꾹 소리가 나른하다. 하품이 난다. 엄마가 기다릴 거야. 마음이 급해진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다. 찬물에 쌀밥이나 한 사발 말아먹고 싶네. 어라, 저건 뭐라니? 신작로 끝을 실눈 뜨고 째려보니 흐느적거리는 아지랑이. 어지럽다. 세상이 빙빙 돌아간다.


해가 길어졌다. 큰길 옆 돌산 언저리에 산딸기가 널렸다. 불쑥 내민 손등이 따끔할 틈도 없이 핏방울을 뿜는다. 입으로 빨아 우선 피를 멈추게 하고 차가운 물에 손가락을 담근다. 개울물을 한 움큼 마시면 배가 불러 좋다. 내친김에 멱이나 감자. 아래위 홀랑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여자애들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저만치 모퉁이 뒤로 조용히 물러선다.

새까맣게 그을린 꼬맹이들이 황톳길 복판에서 짱깨미뽀~ 한방에 거품을 문다. 꼴찌가 다음 전봇대까지 친구들 책보를 들어준다. 아카시아 꿀은 꽃이 질 무렵 달다. 한 잎씩 떼어 밑동을 빨아먹든 한 줄을 통째로 훑어 씹든, 입술은 요술처럼 보라색으로 변한다. 코끝에 닿는 향기가 아찔하게 황홀하다. 상고머리 위까지 척 커버린 밀밭, 고랑을 두 팔로 헤치며 애들이 달음박질친다. 기다란 이삭 수염이 볼때기를 두드린다. 간지럽다.

구봉산 꼭대기에 먹구름이 걸렸다. 달리기 선수보다 빠르게 소나기를 몰고 와 책보 속 공책과 교과서를 홀딱 적셨다. 집에서 마룻바닥에 널어 말려야지. 고무신 목선에 꾀죄죄한 땟국물이 일자로 금을 그었다. 발바닥도 흙탕물에 젖어 허옇게 불었다. 해를 가린 구름이 산등성을 넘어가고 비는 멈췄다. 호랑이 장가가는 바람에 신발, 옷과 책이 몽땅 망가졌다.

날이 찐다. 동네 어귀에서 걸음을 멈춘다. 통나무 다리가 반 이상 물에 잠겼다. 비스듬히 걸쳐있어 무섭다. 구름 걷힌 하늘에서 뙤약볕이 쏟아진다. 새들은 짹짹거리고 냇물은 콸콸 흐른다. 햇살에 묻힌 아이들 수다는 물 위로 공중으로 흩날리고... 볕이 따갑다. 물소리 새 소리가 시끄럽든 말든 졸리기 시작한다. 기다리자, 수업 파한 동네 누나 형들이 올 때까지.


하늘이 높다. 미루나무 가지 위에 흰 구름이 듬성듬성 걸렸다. 코스모스는 알아서 피고 쑥쑥 큰다. 겨울 되면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보고 싶다. 상여 간 뒤 밤나무 숲을 찾아간다. 밤 주울 생각에 코딱지만큼도 안 무섭다. 머리 어깨 위로 밤송이가 투두둑 떨어진다. 제법 많이 주워서 호주머니가 불룩이 튀어나왔다. 가시 박힌 손바닥이 그제야 콕콕 쑤신다. 빨간약을 발라야겠네.

너른 들판에 허수아비 홀로 심심하다. 행길 가로수 아래 낙엽이 쌓인다. 옷 벗은 나무가 엔간히 춥겠다. 은행잎 똥내가 코를 찌르고 주황 감은 붉게 익어간다. 막 수확 끝난 고구마밭에서 애들이 맨손으로 흙을 판다. 암만 못해도 서너 개는 캔다. 빈 벌판은 송장 색 곤충 차지다. 깡통 옆구리에 대못으로 구멍을 뚫어 그 속에 메뚜기를 잡아넣고 군불을 지핀 다음 깡통을 올려놓는다. 타닥타닥 부닥치는 소리가 한참 요란하다. 냄새는 고소하다.

침쟁이 신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족 없는 사람이라 동네 어른들이 장례를 치렀다. 한동안 집 주변엔 얼씬도 안 했는데 어쩌다 몇몇이 문 앞을 서성댄다. 주인 없어도 국화는 피어나고 알 굵은 대추도 늘어지게 달렸다. 서너 개만 들고 가려다 그냥 돌아선다. 대침을 손에 든 할아버지가 고무신을 끌고서 금방이라도 따라올까 무섭다. 근데 참 이상하지. 함석 문짝만 눈에 띄면 코끝이 찡하다. 며칠 전만 해도 침 맞을 일 없다고 신났었는데.


밤새 내린 눈이 밖으로 통하는 부엌문을 막아버렸다. 겨우 바깥으로 나섰다. 눈덩이가 초록 향나무 가지에 엉기성기 앉았다. 양철지붕이 햇빛 받아 눈부시고 처마 아래 고드름을 뿌리째 떼어내 입에 문다. 진저리나게 이가 시리다. 냇가 마른 살얼음이 등고선을 그렸다. 봄아, 어서 와라! 물 아래 송사리가 다 얼어 죽겠어. 학교 주변 멍구들은 신났다. 떼거리로 몰려와 운동장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더니 눈 위에 발자국만 어지럽게 남기고 돌아갔다.

훔쳐 온 성냥을 보란 듯 척 꺼내든 친구 하나가 잔가지를 긁어모아 불을 지핀다. 매운 연기가 눈을 찌르고 마른 눈물을 바가지쯤 흘리고 나서야 불꽃은 살아난다. 모닥불 주변에 빽빽하게 쪼그린 꼬맹이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엉덩이로 어깨로 몸싸움한다. 지난가을 추수 때 남은 벼 밑동이 꽁꽁 언 논바닥에 상투를 틀었다. 천천히 살살 얼음을 지친다. 새 신발이 빨리 닳는다고 미끄럼은 타지 말라던 아버지한테 쪼끔 미안하다.

마을 입구의 하꼬방 앞까지 잿빛 구름이 우리를 따라왔다. 바람이 세다. 굵어진 눈발이 미루나무 가지 새로 회오리친다. 무릎까지만 덮여라, 학교 안 가도 되게. 산골짜기 어둠은 별똥별만치 성큼 내려온다. 언능 집에 가서 아랫목 담요에 손발을 녹여야지. 맘이 급하다. 뒷산 희뿌연 언덕배기 앞에서 하얀 눈이 펄펄 춤을 춘다. 돌아오는 공일날엔 동네 엉아들 따라 산토끼 잡으러 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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