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퇴근하는 저녁 6시 반, 아버지는 어김없이 대문을 나서 출근길에 올랐다. 밤 8시 근무 시작인 분이 30분 넘게 걸어 자기 책상 하나 없는 직장으로 일찌감치 떠났다. 밤에만 일하는 이유를 묻지 못했다. 물어볼 수 없었다. 청양 외진 산골짝 마을에서 서울로 이사와 삼 년 남짓, 그때껏 촌티를 벗지 못했던 상고머리 중학생이 눈치 하나는 빤해서 아버지의 밤샘 일터가 우리 여덟 식구의 밥줄인 줄은 알았던 모양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성적표를 훑어보신 아버지가 엄마에게 말했다. “오케이, 쟤 옷 갈아입혀!” 숭인시장 앞에서 버스를 내리면 육교 건너 태극당 오른쪽에 포스터가 덕지덕지 내걸린 삼층 건물이 아버지의 일터였다. 그날 상영하던 ‘섬머타임 킬러’는 중고생 관람 불가 영화였다. 난감해하는 나를 아버지가 대뜸 일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것이 아버지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였음을 그때는 몰랐다.
문 앞에서 기다리라며 안으로 먼저 들어간 아버지가 검표 직원이 퇴근하자마자 바깥에서 어정거리는 나에게 손짓했다. 최종회 상영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몇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몇 마디 주고받은 아버지가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옆으로 물러서 기다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사람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아버지를 찾았다. 괜히 우쭐했다.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그곳은 온전히 그만의 공간이었다. 내 아버지가 그렇게 높아 보인 적은 그 후로 영원히 없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가 빗자루와 쓰레기통을 들고 나를 찾아오셨다. 내 손에 돈을 쥐여주면서 영화가 끝나는 대로 집에 가라셨다. 관객들이 떠나고 적막한 실내를 구석구석 청소하며 컴컴한 극장을 밤새도록 지키는 것이 그가 하는 일임을 비로소 알았다. 혼자 남은 아버지는 뭔 생각을 하며 긴 밤을 지새웠을까. 평소 고소하던 라면땅이 그날따라 왜 그리도 깔깔한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만 하염없이 걷어찼다.
극장 앞 노점상에서 해적판 레코드를 싸게 팔고 있었다. 명절이나 생일날 등 돈이 생길 때마다 팝송 음반을 사 모았다. 이를 눈여겨보신 아버지가 우리 집 밥상의 서너 배는 더 될 진공관 전축을 가져왔다. 꼬부랑 글씨라고는 오케이와 오라이 밖에 모르는 분이다. 레코드판 표지에 ‘Top of the world’라 쓰인 레코드판도 한 장 함께. 전기세 아끼라고 불같이 성화를 부리던 그가 허구한 날 전축을 틀어놓는 나에겐 언짢은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서 영어 노래 속에 나오는 단어 몇 개를 흥얼거리다가 멋쩍게 씩 웃곤 하셨다.
아버지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나를 극장에 데려갔다. 친구들과 함께 오라 해서 여럿이 간 적도 있었다. 영화를 보려고 학교 단속을 피해 의정부나 혜화동으로 원정 갔던 친구들이 단체로 잡혀 복도에서 머리 위로 두 손 들고 벌서던 시절, 나는 아버지의 위세 아래 당당히 영화를 봤으니 그때가 평생 큰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본 적 없었던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시대였지 싶다.
우리 가족이 월세 싼 산동네로 옮겨가고 나서 나는 극장 건너편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신생 명문고라고 했다. 좋은 영화가 왔다고 저녁에 보러 오라며 아버지가 미리 귀띔해줘도 언제부턴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기 시작했다. 깜깜한 공간에 아버지만 홀로 남기고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 말이 여덟 식구의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짊어졌을 고단한 삶의 무게까지 고스란히 헤아렸을 만큼 철이 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사람들에겐 감추고 싶었다. 누군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회사에 다닌다고 얼버무렸다. 가끔 푼돈이야 챙겼을망정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여 충실히 살아온 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일이 내 눈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부끄럽게 여겼었다. 그런 성실함은 차치하고라도 좋으면 좋다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뱉지 못하는 나의 멋대가리 없음이야말로 영락없이 아버지를 빼닮았다.
“오늘 내일 하신다.” 중복을 갓 넘긴 한여름, 형님 전화를 받고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가물가물 꺼져가는 생명을 떠올리며 도착했으나 아버지는 사흘 밤낮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용케 내 위치를 알아낸 거래처들로부터 연락이 빗발쳤다. 업무로 복귀하기도 그렇다고 마냥 서울에 머무르기도 어정쩡했다. 우선은 돌아가야 했다. 친구들 만나 저녁 먹고 오겠다는 내 속내를 알아채신 듯 아버지는 몇 번이나 나를 불러 세웠다. 둘이서 할 말이 있으니 바빠도 잠깐 왔다 가라던 아버지를 뒤로 나는 병원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밤 비행기에 올랐다.
그를 떼어놓고 왔다는 미안함이 밀려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던 간절한 눈빛이 줄곧 눈앞에 어른거렸다. 매일 밤 휴대전화기를 열어놓고 기다리기 열흘째, 수화기 저편에서 아득히 들려오던 동생의 목소리는 차라리 담담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둘째와 할 얘기가 있으니 빨리 데려오라고 역정을 내셨다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아버지는 눈을 감지 못하고 열흘씩이나 버텼을 거라는...
깊은 밤 당신 홀로 잡동사니 널브러진 바닥을 청소하다 잠깐씩 틈을 내어 선잠을 청했을 딱딱한 나무 의자는 컴컴한 극장 안 어딘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사랑한다는 그 쉬운 말을 쑥스러워 입 밖에 꺼내지 못했고 잠깐만이라도 보고 가라던 그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했다.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다. 떠나신 지 30여 년, 꿈속에서조차 아버지는 한 번도 당신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보고 싶다고, 그때 정말 죄송했다고 털어놓고 싶은데. 나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당신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