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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Jun 21. 2023

게으르길 잘했다

   헛웃음을 켰다. ‘5평’짜리 주말농장 분양 광고, 거기다 뭘 얼마나 심어? 적어도 백여 평은 되어야 일하는 맛이 나지 않겠느냐고 시건방지게 거들먹대며 한동안 놀리던 뒤땅에 보란 듯이 삽질을 시작했다. 당장 밭두렁을 만드는 작업부터 만만찮은 육체노동이었다. 몸이 쑤셔 밤새 끙끙거렸다. 시장이나 마트 진열대의 채소류가 인간의 노동을 듬뿍 담은 인고의 결과물임을 실체가 아닌 관념으로만 떠들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시작하자마자 발목이 근질댔다. 목과 손등도 따끔거렸다. 며칠 후 잡초를 뽑기 시작하면서 등판으로 허벅지로 두드러기가 붉게 번졌다. 그 잘난 텃밭에 알량한 채소 몇 종류 심어놓고는 세상 농사 혼자 다 짓는 양 주접을 떨었다. 두 해 넘게 귀한 땅을 팽개쳐둔 게으름의 대가일 것이다. 뒤뜰 벌레와 미생물이 자기들 영역으로 침투한 이방인 주인을 가만둘 리 없다. 그럴 만하지. 점유권(占有權)을 앞세운 그들에게 나는 한낱 무례한 객(客)에 불과했을 테니. 


   뜰은 살아있다. 계절과 날씨 변화, 오전 오후 그리고 낮과 밤에 따라 수시로 모습을 달리한다. 한 번 혼쭐나고부터 뒤뜰이 징글맞았다. 뙈기밭으로의 발길을 멈췄다. 꽃 피고 장마지고 단풍 들고 눈 내리기를 세트로 두 번, 자기 집 뜰 앞이 지저분해서 싫었을까, 뒷집 아저씨가 뭐라도 심어보라고 권한다.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땅을 골라주겠다면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있는 말이다.

   절대농지를 놀려두면 세제상의 불이익을 받을 거라던 말도 들은 것 같다. 내친김에 무농약 유기농 채소를 가꾸리라 각오를 다졌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이랑에 채소나 몇 개 심으려다가 거름만 주면 알아서 큰다는 땅콩과 옥수수를 끼워 넣었다. 희망에 들뜬 귀동냥 왕초보 농부는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이 많았으며 몇 년 전 무섭던 벌레들의 무차별 공격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얇은 목장갑, 그 위에 고무장갑 그리고 목을 감싸는 겨울용 등산 셔츠를 껴입었다. 두꺼운 양말 안에 바짓단을 꾸겨 넣어 벌레가 옷 속으로 침투할 여지를 아예 없앴다.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얇은 수건으로 목과 얼굴도 감쌌다. 햇빛 방지용이라기엔 한참 고급스러운 레저용품으로 무장하고 무례한 뜰의 주인과 한판 전투라도 벌일 각오를 다졌다. 인간이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해 자신을 망친다는 말이 틀렸음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모종 심기 작업은 순조로웠다. 정리된 밭고랑 앞에서 편안했고 제대로 무장한 작업복 덕에 벌레가 물어뜯지 않아 견딜 만했다. 잘 자란 수확물을 따먹을 일만 남았다고 신났다.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을 때까지만. 삼사일 만에 쑥 자란 잡초가 열흘쯤 후엔 모종보다 커졌고 뽑아도 짓이겨도 물러설 싹수라곤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엄마의 능청이 떠올랐다. “독한 것. 뽑고서 뒤돌아보면 그새 한 뼘이나 자랐네! 쟤들 크는 소리, 시끄러워.” 그땐 그냥 웃었는데...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뼈도 살도 안 아픈 데 없어 앉아있기도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엑스레이 화면에서 눈을 떼며 도리질한다. 

   “설거지? 한동안 멈추셔야겠다. 쪼그려 앉아 풀 뽑는 일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해 늦여름부터 방울토마토 아닌 방울 크기 토마토, 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오이와 대여섯 종류의 여린 쌈, 덜 여물어 물컹한 옥수수를 맛봤다. 땅콩은 흙 속에서 거름이나 되었을지.

   다시 휴지기로 들어섰다. 팔자에 없는 농사인 듯 나에게 텃밭은 관상용이 어울리지 싶다. 벌레가 물어뜯고, 허리와 팔다리가 아파서, 바깥 일이 바빠,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서 등 온갖 이유가 때마다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봄이 되면 내가 심은 적 없는, 어디서 왔는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끔은 생김새조차 처음인 풀과 꽃, 벌레가 뜰을 가득 메웠다. 내가 손을 댔더라면 만날 수 없을 풍경이었다. 놀랍게도 이젠 새벽 어스름과 저녁 안개가 뜰에 내려앉는 방식까지 눈에 들어온다. 게으르길 참 잘했지.     


   풀과 나무가 뒤덮은 농가 주택 앞, 브레이크를 지그시 밟아 속도를 줄인다. 밭과 마당의 경계선에 두릅나무가 담을 쌓았다. 촘촘한 잎새에 가려 밭 안쪽이 거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 설핏 움직이는 물체, 분명 사람이었다. 누구일까보다는 뭐 하려고 거기까지 들어갔는지가 더 궁금하다. 달려드는 벌레, 가시 돋친 잡초, 지렁이, 개구리 그리고 가끔 초록뱀까지 뜨는 미니 정글인 줄 몰랐다 쳐도 괘씸하다. 멀건 대낮부터, 어쨌거나 남의 텃밭인데 왜 휘젓고 다녀?

   “윗마을 살아요. 잡초가 무성해서 사람 안 사는 집인 줄 알았네. 얼핏 봐도 약 먹지 않은 쑥이 널렸길래 떡 쪄먹을 만큼만 캐가려고. 쑥개떡 맛있거든요.”

   어라? 마당을 한참 지나야 밭이다. 땅바닥에 깔린 쑥을 봤을 리 만무하고. 거짓말! 그런데 어쩌겠나, 넘어가야지. 그나저나 빈 집인 줄 알았다니, 내가 게으르긴 게을렀던 모양이네. 참 두릅이 쑥쑥 오르던 얼마 전 4월, 한참 더 커도 모자랄 손톱 크기 새순을 누군가가 한 개도 남기지 않고 양심 없이 죄다 따갔다. 혹시? 워워, 그만~! 나는 속상했을지언정 어떤 사람은 즐거웠을 거 아냐? 인심 한 번 오지게 썼다고 쳐요. 그럼 됐지. 게으르길 정말 잘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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