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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Jul 09. 2023

봄꽃보다 늦단풍이

   칠순이 코앞인 형님의 고민이 깊었다. 멀쩡한 대낮에 동네 골목길을 헤매고 차를 내리다 어지러워 자빠지지를 않나, 몸도 마음도 다 아프다며 애처럼 징징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이 예순아홉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걸리는지 자신도 갈 때가 되었다는 푸념을 볼 때마다 늘어놓았다. 없는 걱정 왜 사서 하느냐고 매번 거칠게 소리를 높였는데 마의 아홉 수를 넘겨 3년, 이젠 나더러 건강 챙기라며 거꾸로 훈수다. 멀쩡해서 반갑고 어이없어서 웃는다.

   3기 암 선고를 받은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밥 먹자. 얘, 살만해졌나. 의사 선생이 뭐래? 통째 자른대. 술은 끝이군. 담배도 땡이지. 수술 언제? 이번 일요일. 잘하면 죽겠네? 아마도. 한참 나인데 억울하지 않아? 됐고, 밥 먹자니까! 사랑하는 하느님한테 대놓고 엉겨봐, 딱 한 번만 살려달라고. 그래 볼까? 오랜만에 나들이 겸 친구 만나 밥 한 그릇 먹게 되었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리니.

     

   통계치를 살피면 백세 시대라는 말의 맹점을 금방 안다. 2020년 한국인 평균 기대 수명은 여든셋, 건강수명은 예순다섯이다. 둘의 차이 18년은 몸이 좋지 않아 불편하고 움직이기 힘든 기간을 뜻한다. 아흔 이상 인구가 오천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백세 시대라는 허울에 밀려 관심 밖이다. 여든세 살 어른이 아흔까지 생존할 확률은 27%니까 그 나이 어른의 넷 중 세 분이 아흔 살 전에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다, 받아들이기 불편하나 엄연한 현실이다.

   단순히 숨만 쉬는 생물학적 상태는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어머니나 모 대기업 회장 그리고 두 살 위 선배는 서너 해 넘게 침대 생활만 하다 명을 달리했다. 주변의 안타까움은 덮어두고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오죽했을까. 생명의 존엄과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식의 장수 사회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안락사’나 ‘연명 의료 거부’ 등의 껄끄러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원로 교수 한 분은 생전 인터뷰에서 가을 단풍이 봄꽃보다 곱다고 했다. 반드시 죽는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의 의미를 모른 채로 죽는다고 러시아의 한 작가는 꼬집는다. 아름다운 지구별로 잠깐 소풍 왔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사건을 죽음이라고 읊은 시인도 있다. 그 얘기들이 갖는 공통점이라면 죽음을 겁내거나 슬퍼할 대상이 아닌 살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누가 감히 삶의 의미를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으랴만 단연 자주 언급되는 화두 중 하나는 사랑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사랑과 일(love and work)을 인생의 전부(all)라고 주장한다. 직업이 없으면 삶이 곤궁해지고 감성적 충족 수단인 사랑 없이는 인생이 건조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자신의 학설을 보완하기 위한 근거 제시용 설명이라 해도 원론적 의문 하나는 여전히 남는다. 사랑과 일만으로 우리의 삶이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라는.

   유발 하라리의 “초 예측(Super Forecast)” 몇 구절을 빌려 프로이트의 말을 보완해본다. 평균 수명이 짧은 시대의 은퇴 준비는 금융자산 축적, 즉 경제력이었다. 이젠 여가를 오락이 아닌 내적 미래 자산 축적에 힘쓰고 일을 통해 삶을 재창조하라는 권유, 여가는 은퇴 이후가 아닌 살아가면서 누릴 덕목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가를 학습에 투자해야 합리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두 대가의 ‘일과 사랑’ 그리고 ‘여가’를 뭉뚱그려보면 이해가 한결 수월하다.

   ‘여가’, ‘장수 사회’, 그리고 ‘일과 사랑’ 등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반영한다. ‘사람답게’는 인간의 소망과 바람,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싶다는 말이고. 젊은 층은 주 40시간 근무를 통한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노동과 삶의 균형)을, 중장년층은 건강한 일상을 선호한다. 어느 쪽이든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와 정신적 육체적인 건강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희망 사항이다. 보통 사람에게 산다는 행위는 이래저래 쉽지 않다.    

  

   세계적으로는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와 러시아의 핵 위협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패권 장악 다툼이 뉴스의 단골 메뉴다.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달아오른 진영 논리를 바탕으로 정치권 인사들이 뭇 대중을 선동 기만 세뇌하는 구태를 이어간다.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 쌍방의 욕망과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런 관념 세계는 현학적인 요소가 다분하여 소모적 정쟁을 유발하고 분열을 부추긴다. 그러나 거창한 담론은 그들 몫, 당장 내 주변에는 그보다 훨씬 절박한 상황이 차고 넘친다.

   코로나와 독감, 건강 문제, 노후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선후배와 어른이 주변에 허다하다. 젊어서는 일하랴 돈 벌랴, 나이 들면 건강 문제로 사람답게 살기 쉽지 않다. 없는 대로 힘든 대로 인정하고 욕심을 줄여... 공자께서 웃겠네. 하나 마나 한 잡소리를 접고 전화기를 연다. “형님, 100살 넘을 때까지 꾸역꾸역 사시오.”. 보내기 단추를 꾹 누르고 자판을 또 두들긴다. “3기야! 얼굴 보자. 이번 토요일 12시, 문정동 선녀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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