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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Jun 08. 2024

루이의 변명

나는 왕이었습니다

   나는 프랑스의 왕이었습니다. 몇 해 전, 서울 소재 어느 대학에서 ‘루이 16세와 프랑스혁명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기말시험 과제물을 내놨습니다.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서 나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나에겐 몰락의 시작이었던 18세기 이 사건을 나의 관점으로 간략 정리하고 싶더군요. 당신에게는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치라면 치를 떠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있고요.     


   프랑스혁명은 시민계급이 봉기하여 봉건적 절대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의 혁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대부분의 혁명이 피로 얼룩졌듯이 프랑스혁명 또한 숙청과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내 주변 인물과 가족, 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 내부의 적을 죽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게 혁명의 본질일 지도 모릅니다.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Ancien Régime)는 성직자와 귀족이 면세특권을 누리며 각각 전 국토의 10%와 20%를 소유하는 구조였습니다. 2% 미만 50여 만의 상위 계급이 40%의 토지를 가지고 호화롭게 살아가는 반면 2,700만에 달하는 제3신분 시민계급은 나머지 60%의 토지에서 얻는 수익으로 생계 충당 및 왕실경비 부담이라는 불평등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때가 되면 터지는 거죠. 예나 제나 먹고산다는 일의 중요성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이 제도를 개혁하고자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와 왕실경비 삭감 조치를 목표로 했던 명사회 그리고 제1신분과 제2신분에 대한 과세동의를 얻으려던 삼부회는 소득 없이 끝났습니다. 삼부회를 무력화한 제3신분 대표들의 테니스코트 선언으로 인하여 절대왕권의 허약한 단면이 속속들이 드러났으며 제3신분의 정치의식을 자극하는 기폭제로 작용했습니다. 

   문제는 부르주아 계층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동원 이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추후 노동자의 권익 상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게 시대의 대세였는지,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던 권력의 속성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나의 무능함도 문제였으나 국가를 위한 거시적 결정보다 자기들의 이권 유지가 우선인 귀족의 근성을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역사적’이라는 일도 알고 보면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국가재정이 어려워졌는데, ‘It’s the economy, stupid!’이라며 재선에서 승리한 미국 대통령의 촌철살인 경구를 그때 들었다면 내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난 국민의회가 요구하는 두 가지 선언의 반강제 이행을 계속 거부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파리의 여성들이 빵을 내놓으라며 10월 폭동을 일으켜 베르사유궁으로 침입했습니다. 왕실 용병대를 죽이고 왕실 일가 전부를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끌고 갔습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베르사유궁 난입은 분명 시민들의 ‘폭동’이었으나 역사는 이 사건을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으로 기록합니다. 

   나의 불안은 차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위기감으로 커졌습니다. 설마 태양왕의 후예인 내게 감히 그러랴 싶던 귀족의 배신과 시민들의 분노 앞에서 왕의 위엄은 고사하고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1791년 6월 나는 옆 나라 오스트리아로 도피할 계획을 세웁니다. 궁 안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첩자에 의해 빠짐없이 감시 보고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요. 솔직히 말하자면 국왕으로서의 위엄이나 창피함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평가의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있었다고 에둘러 설명하는 중입니다. 지난 역사를 재정비하여 바꾸는 작업이 어렵고, 어렵게 바꾼다 한들 내 시대가 돌아올 리 없지만요. 대한민국에서 지난 몇 년을 풍미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와는 규모가 다르고 실현 가능성도 사실 없었습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껍데기를 내세운 정치권은 정권을 획득하는 순간 정적을 두드려 패기 바쁩니다. 자신들의 정당성 확보를 다지기 위한 작업입니다. 

   이전 정부의 공은 일단 무시합니다. 필요하다면 변색 작업도 불사합니다. 잘했거나 못했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끌어내려 자신을 높이려는, 비신사적인 행위를 일삼습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런 관례가 정치적 변혁기의 일과성 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시대를 뛰어넘어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죽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대와 사람만 바뀐 채로.     


   1793년 1월에 나는 죽습니다.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왕정 시절 국민을 힘들게 한 본질적 문제는 접어두고 급진적 변화부터 추진합니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피는 피를 부른다는 만고의 진리처럼 이번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 등 개혁의 주역들이 단두대로 보내지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급진주의 정치 실험은 허망하게 막을 내립니다.

   묘한 일입니다. 쿠데타든 혁명이든, 개혁이든 반동이든 또는 야합이든 정략이든 간에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 기선을 장악한 세력이 거꾸로 무너진다는 점이요. 세상의 이치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온전하게 권좌에서 내려온 대통령이 없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1년 지나 1795년 수립된 유산계급 중심의 총재정부는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군대에 의존하다가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이 주도한 1799년 쿠데타로 무너집니다. 엄밀히 말해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라기보다 군사적 정복자였으나, 혁명의 성과를 수용하여 프랑스 시민계급의 재산권과 행정제도를 확립시키고 근대 국가의 기틀을 세운 혁명의 완성자로 평가됩니다. 

   프랑스 시민이 왕정 시대의 불평등과 야만적 관행을 보며 품었던 적의와 분노는 덮어두고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즉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는 평가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막강 황제도 머나먼 섬으로 유배당해 쓸쓸히 죽었죠. 이 분야에서 대한민국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나폴레옹의 공과가 있듯이 어느 정치인인들 과실이 있기 마련이지요. 나쁜 과거사가 정당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옳든 그르든 간에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더라는 얘기입니다. 


   사족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새로운 사회 건설을 기치로 내걸었던 혁명 세력의 속내는 그들 말대로 한결같이 순수했던 것인지, 혁명 진행 과정에서 지도급 인사들이 성난 민중의 적개심과 분노를 이용하여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위선적인 말과 행동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오류가 20세기의 현대 정치사에 만연한 대중 조작과 영합의 못된 답습은 아니었는지 이 시점에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 

    지구촌 전체가 전쟁과 역병으로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다지요. 기후변화와 이념 종교 등의 갈등으로 살기 힘들다던데. 나 살던 그때도 똑같았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300명의 선량(煽亮)을 뽑는다죠. 그들의 달콤한 공약을 국민 여러분이 제대로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선거 결과에 대해 서로 간 더는 시비가 없기도 바랍니다. 지구촌 그대가 늘 행복하기를, 자랑스러운 당신의 조국 대한민국이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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