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사랑은 절대평가입니다.

어린 날 이야기

by 십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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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번잡스러운 곳이야. 이곳은.'



추적추적 비가 오던 날, 야간자율학습을 평소보다 빨리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횡단보도 앞은 사람과 우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우르르 움직이는 사람들. 나는 그 속에서 탈출하려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내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 걸음이 정말 빠르구나."


나와 같은 반 남학생. 당시 나는 편입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녔고, 내가 속해있던 반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었지만 그냥저냥 눈인사는 하는 정도여서 인상착의는 알고 있었다. 사실 학기 중간에 들어온 그의 어딘가가 내 시선을 끌기는 했다. 하지만 편입시험이라는 막중한 이벤트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시기가 아니었다.


헌데 그가 '굳이' 내게 말을 건 것이다. 그는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어디 사냐, 무슨 과를 가고 싶냐, 공부하는 건 어떠냐 등 뻔한 질문을 했다.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또 짧은 대화였지만 10년을 알고 지낸 것 같은 이 편안함(은 매트리스?)...


이후 우리는 간간히 대화를 나누며 돈독해졌다. 하지만 둘 다 공부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적정선은 유지하며 적당히 친해지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하자고 말을 꺼낸 적은 없다. 그냥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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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시험이 끝났고, 우리는 그동안 참고 있던 사교성을 마음껏 뽐내며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일과를 꿰뚫고, 근사한 곳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전화도 거의 매일 했다. 또 그는 꽤 먼 거리였던 우리집에도 자주 놀러왔다. 남자랑도 이렇게 친해질 수 있구나!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취향이 비슷해서 대화를 하다보면 "너도?, "나도 그래!"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많고 많은 아이돌 중에서 에프엑스의 크리스탈을 좋아했는데, 난 그게 좋았다. 크리스탈이야 말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의 집합체(분위기, 음악 취향, 몸선 등)였기 때문에 우리가 크리스탈을 '함께' 좋아한다는 게 좋았다. 무언가를 함께 좋아한다는 게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요인일테니까. 그뿐만 아니라 그는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내 낮은 음성과 느릿느릿한 행동도 좋아해주었고, 내가 실없는 얘기를 해도 그 엷은 미소를 지으며 진심으로 들어주었다. 잘 정돈된 침구처럼 단정하고 포근했던 그는 참 따뜻했다. 정확히 대학에 입학하기 2주 전인 2월의 중순까지.


그는 갑작스레 내게 이별을 고했다. 앞으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매일 하던 전화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관심을 뚝 끊어버렸다. 우리는 연인이었던가? 아닌데, 우린 친구였는데. 나랑 절교한 건가? 모르겠네, 보통 절교하기 전에는 엄청 싸우지 않나? 이상하네, 우리는 싸운 적도 없는데. 너는 대체 왜 내게 급작스럽게 안녕을 고한 것이냐?


끊이지 않는 의문 속에,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한 장면. 나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진심으로 들어주던 네가 참 성인군자처럼 보여서 어느 날 질문을 했다. "너는 어쩜 그리 착해?". 그는 대답했다. "나 별로 안 착한데?". 그때는 그 대답마저도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네 말이 진실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됐다. 그는 착한 게 아니었다. 그가 마냥 착해서 내 이야기를 성실히 들어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취향이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했던 게 아니라! 나를 좋아해서 내 말을 잘 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성으로서 말이다. 엄청난 배신감이 몰려왔다. 나는 정말 우리가 소울메이트인줄 알았는데, 나 혼자 우정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는 그때의 우리.



철이 없었죠. 그와의 우정을 꿈꿨다는 게.



그로부터 2년 후, 오랜만에 만난 그는 더 이상 크리스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대세인 아이린을 좋아한다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어떻게 한번 좋아한 사람을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냐? 크리스탈이 급변한 것도, 어떤 구설수에 오른 것도 아니고. 크리스탈의 그 분위기는 그대로인데 말이다. 그때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가 크리스탈을 좋아한 건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한데 그의 마음속에 마련한 여자 연예인의 자리는 한 명분이어서 '크리스탈'에서 '아이린'으로 대체된 것뿐이었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가 예전에 내게 안녕을 고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로 새로운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했을 뿐, 내게 고했던 이별엔 악의는 없었다. 그는 그냥 그런 사람일 뿐.



젊은 우리는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예의 없이 안녕했을 뿐. 누가 누구를 탓하리.



물론 저 일화를 가지고 사랑을 논할 수 없다. 풋풋하지는 않지만 어리숙한 냄새를 풍기는 스물 중반 여자, 남자의 해프닝 정도이니까. 사실 돌이켜보면 저 시절의 나 역시 그와의 사랑을 바란 적 없다. 나조차 새로운 세계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그와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고, 그를 옆에 두고 싶은 마음에 우정이라 합리화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랑은 무언가로 대체할 수 없다.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더 나은 것이 눈앞에 보인다 해도, 별 관심이 없는 것. 즉 사랑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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