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 워홀 일기 06
신규 입사 동기인 우리 넷은 슈퍼바이저 뒤를 아기오리처럼 졸졸 따라갔다. 팩킹 쉐드 중간에 불쑥 놓여있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팩킹 쉐드의 필수품을 받았다. 흐물흐물한 하늘색 헤어캡과 일회용 니트릴 장갑. 농장에 따라서 장갑을 직접 사야 하는 곳도 있는데 O팜의 캐비닛에는 장갑이 사이즈 별로 박스째 놓여 있었다. 꿀잡이라는 말이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적용되는 건가. 그때까지도 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계 소음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빨간 헤어캡을 쓴 슈퍼바이저는 쉐드의 가장 앞쪽에 위치한 라인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셀러리를 다듬고 포장하는 곳이었다. 셀러리! 먹어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채소였다. 셀러리 라인은 4가지 파트로 나뉘었다. 기계에 셀러리를 올리는 사람 한 명, 뿌리를 써는 사람 한 명, 줄기를 뜯는 사람 한 명, 마지막으로 포장된 셀러리 백에 스티커를 붙이고 크레이트에 담아 파렛트 위에 쌓는 사람 한 명. 신입 넷은 각각의 파트로 보내졌고 나는 그중 3번 포지션에서 뜯기를 맡았다. 셀러리를 마트가 아닌 곳에서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에게 셀러리는 스틱 형태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손바닥 정도 길이의 줄기만 있는, 이파리는 신선함을 강조하기 위해 몇 장 남겨둔 것이었다. 식재료가 아니라 식물에 가까운 셀러리, 농장에서 갓 수확해 보내온 셀러리는 정말 믿을 수 없게 거대했다. 셀러리가 이렇게 큰 거였다니. 호주 셀러리는 한국 셀러리와 종이 다른 건지 의심스러웠다. 자연 상태의 셀러리의 부피는 김장철에 절이던 배추만큼 두꺼웠고 길이는 내 상체만 했다.
다행히 3번 파트는 거대 셀러리가 아닌 조금 작아진 셀러리를 마주하는 곳이었다. 앞 단계에서 기계와 사람이 위아래로 예쁘게 썰어낸 셀러리를 적당히 뜯어내는 게 주된 작업이었다. 약간의 오차 범위를 두고 무게를 맞추는데 포장지에 꽉 끼이면 터질 수 있으니 셀러리가 너무 뚱뚱하지 않아야 했다. 슈퍼바이저는 배추만 한 셀러리를 한 손으로 가뿐히 들고 거침없이 줄기를 뜯어내 무게를 맞췄다. 뜯어낸 줄기가 많아 뿌리가 길어지면 작은 칼로 썰어내고 바로 옆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리면 끝. 시범을 보여줄 때는 한없이 쉬워 보였는데, 심지어 이렇게 글로 써도 억울할 정도로 쉬운데 실전은 만만치 않았다.
팩킹 쉐드에서 기계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나도 기계만큼 속도를 내야 한다는 뜻임을 그때 깨달았다. 앞사람이 넘긴 셀러리를 다듬고 상태를 확인한 뒤 벨트에 올리는 걸 몇 초만에 해치워야 했다. 무게가 손에 익지 않아 저울에 재느라 몇 초가 들었고 흙이 묻은 셀러리가 오면 일회용 행주에 물을 묻혀 깨끗이 닦아주느라 또 몇 초가 지났다. 그 잠깐 사이에 테이블 위에는 뜯어낼 셀러리가 한가득 쌓였다. 컨베이어 벨트에 셀러리를 올리는 사람은 나 하나여서 내가 늦으면 다음 사람은 일이 없어지고 앞사람은 셀러리를 놔둘 공간이 없어지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다행히 첫날이라 슈퍼바이저들이 번갈아 가며 내 파트에 와서 셀러리 뜯기를 도와줬다. 정신없이 셀러리를 뜯다가 스모코-15분 정도의 짧은 휴식- 시간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본 얼굴은 아주 볼만했다. 헤어캡에 잔뜩 눌린 머리와 얼빠진 표정. 작업복이 얼굴에 형광 연두색을 칠해주고 있었다. 퍼스널 컬러는 잘 모르지만 이 색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긴 할까. 런치룸 테이블에 앉아 쉬다가 마찬가지로 약간씩 넋이 나가 있는 신입 코워커들과 말을 텄다. 한 명은 날 픽업해 주신 분과 같은 동네에 살고, 일본인 코워커 둘은 아직 집을 구하지 못해서 나와 같은 동네의 카라반 파크에 살고 있었다. 그쯤 나도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즌에 맞춰 새롭게 이사 온 백패커들이 많아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둘이 사는 카라반 파크는 건물 대신 카라반을 가져다 놓고 숙식비를 받는 호스텔 비슷한 곳이었다. 카라반 파크에서는 매주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궁금하던 참이어서 거기서 사는 건 재밌냐고 묻자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다. 컨테이너처럼 생긴 카라반 하나에 4명이 사는데 주에 195불을 낸다고 했다. 그 정도면 동네에서 넓은 독방을 쓸 수 있는 금액이었다. 돈은 많이 받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카라반부터 공용 공간까지 전부 더럽고 침대가 축축하며 가끔 방 안에 쥐가 들어온다는 삼연타를 날려 로망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카라반 파크보다 더 충격적인 건 두 사람이 출근한 방법이었다. 출근할 차를 못 구해서 새벽에 출발해 농장까지 4시간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픽업 차 안에서 본 그 컴컴한 어둠 속을 걸어왔다고? 대형 트럭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가로등 하나 없는 그 길을? 한 명은 나랑 동갑이었고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나는 이 농장보다 한 시간 가까운 C팜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었기에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 깡은 있어야 해외에 나오는 건가. 혹시 농담하는 건가 싶어 진짜냐고 되묻는데 다른 코워커가 출근길에 걸어오는 모습을 봤다고 퇴근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퇴근도 걸어서 한다는 말에 코워커가 픽업을 제안했고 그 둘이 아주 고마워하며 짧은 스모코가 끝났다.
새 장갑을 꺼내서 끼고 다시 셀러리 라인으로 돌아가자 적응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는 듯 피드백이 계속 들어왔다. 셀러리 라인의 끝에서는 내가 셀러리를 벨트 위로 올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에 셀러리를 올리면 기계가 비닐 백에 셀러리를 하나씩 포장해서 뱉어낸다. 스티커를 붙이기 전 마지막으로 빠르게 검수하고 불량품을 골라내 바스켓에 담아둔다. 포장 불량일 경우 포장지를 뜯어 다시 벨트에 올리고, 셀러리 불량일 경우 나에게 피드백과 함께 다시 돌아온다. 그 피드백은 주로 이런 것이다. 셀러리를 너무 많이 뜯었다, 이건 너무 조금 뜯었다, 여기 흙이 덜 닦였다, 뿌리가 이렇게 길면 안 된다, 셀러리 안쪽이 상해있는데 이건 불량품이니까 잘 보고 분류해야 한다 등등. 어떻게 단 몇 초만에 그 모든 걸 다 해내라는 건지 의문이었다. 피드백을 들을 때도 셀러리 뜯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창고에 넣어뒀다가 꺼내온 셀러리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와 손가락이 시렸다. 점심을 먹고 또 셀러리를 한없이 뜯다가 3시가 되기도 전에 일찍 일이 끝났다.
그때까지 미들 타임에만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퇴근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그대로 내려놓고 집에 돌아가면 끝이었는데 농장은 달랐다. 오픈부터 미들, 마감까지 전부 다 함께 했다. 일하면서 사용한 모든 것을 아침에 출근해서 본 상태로 되돌려 놔야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슈퍼바이저의 말을 빌리자면 바닥에 셀러리 잎 한 장 없어야 했다. 셀러리 잎을 잘라주는 기계, 도마, 칼, 컨베이어 벨트, 테이블, 바스켓을 전부 쓸고 닦고 호스를 연결해 바닥에 물청소까지 한 뒤에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블로그와 유튜브를 그렇게 봤지만 마감 청소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까지 내가 해야 한다고? 다들 그렇게 일하는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 뭐 청소부라도 있을 줄 알았나? 거 참 편하겠네, 싶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물청소로 축축해진 옷을 세탁기에 돌려두고 파스를 붙였다. 그대로 누워서 자버리고 싶었지만 아직도 해가 중천이었고 할 일도 많았다. 당장 먹을 저녁과 내일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야 했고 안전화도 사야 했다. 작업복을 살 때 안전화는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월요일에는 들어오겠거니 하고 미뤄뒀다. K마트에 가보니 여성용 안전화는 아예 재고가 없고 남성용 중 가장 작은 게 8 사이즈였다. 내 발보다 30cm나 크지만 두툼한 스포츠 양말을 두 개 신고 끈을 꽉 조이면 질질 끌고 다니진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사버렸다. 사이즈를 맞춰 사려면 옆동네까지 가야 하고, 평일에는 출근할 테니 주말에나 갈 수 있고, 그럼 나흘은 안전화 없이 일해야 했다. 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고 세운 철칙은 절대로 다치지 않는 것이었다. 잘리는 한이 있어도 다치지는 말 것. 병원에서 영어로 설명하고 진단받는 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니까. 새로 산 안전화는 발가락 부분에 보호대가 들어가 단단하고 무거웠다. 동네 친구인 언니들을 만나 팔에 붙인 파스들을 보여주며 너무 힘들었다고 징징거리고, 내가 포기한 농장에 출근한 언니의 얘기도 들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안전화와 저녁거리로 가득 찬 가방을 메고 그새 어두워진 길을 걷는데 이게 가장의 무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최소 세 달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잘 버틸 수 있을까? 당장 해결해야 될 문제는 픽업이었다. 지금 픽업을 해주시는 분은 거리가 멀어 3일만 픽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3일 안에 앞으로 날 픽업해 줄 코워커를 찾아야 했다. 일만 시작하면 될 줄 알았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왜 진작 면허를 따지 않았는지, 너무 준비를 안 하고 왔다고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해결할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