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 워홀 일기 07
하루빨리 픽업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찾은 곳은 페이스북 지역 페이지였다. 호주에서는 페이스북으로 중고 거래도 하고 집도 내놓고 차도 팔지만 그때의 나에게 페이스북은 영 신뢰가 가지 않는 곳이었다. 이상한 사람이 연락하면 어쩌지-실제로 이상한 사람이 연락하는 일도 있었다-라는 생각에 미루다가 일단 해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상황을 적고 출퇴근 픽업을 구한다는 짧은 글을 올렸다. 돌아온 메시지 대부분은 일을 어떻게 구했냐는 내용이었다. 전에 없던 구직난에 다들 일을 구하려고 안달이었다. 마트에서 줄을 서다 알게 된 친구는 R팜 밭에서 브로콜리를 수확하는데,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하는 날이 많아 돈이 안 되지만 연락오는 농장이 없어서 그만둘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었다. 차를 태워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일할 때 쓰는 트레일러라는 말에 고맙지만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두 번째 출근은 전날보다 한 시간 늦게 일이 시작되어서 비교적 여유로웠다. 미리 만들어둔 치킨랩을 가방에 챙기며 오늘은 정말 코워커에게 픽업을 부탁하자고 다짐했다. 왜 먼저 코워커에게 물어보지 않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지 궁금할 텐데 이유는 간단하다. 부탁을 못하는 성격이어서 그랬다. 부탁이 어려워서 안 하다 보니 점점 더 어려워져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나를 두 배로 쥐어짜서 어떻게든 해결해 냈다. 특히 이런 상황, 상대가 내 부탁을 거절할 가능성이 있고 그 뒤에도 상대를 계속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정해도 오늘은 오늘의 오더를 완성해야 했다. 화이트보드 속 내 이름 옆에는 당근이 적혀 있었다.
첫 주 동안에는 매일 새로운 작물을 포장했다. 포장만 하는 곳이다보니 워낙 다루는 채소가 많아 처음 하는 작물이 끝없이 나왔지만 셀러리, 당근, 양배추처럼 계속 나오는 채소가 몇 종류 있었다. 당근 솔팅은 컨베이어 롤러 위로 굴러오는 당근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까맣게 썩은 부분이 있거나 부러져서 길이가 너무 짧은 건 러비쉬-rubbish, 쓰레기- 바구니에 넣고 부러졌지만 2/3 이상 남아있는 당근은 세컨드 빈으로 골라내는 일이었다. 이 세컨드 등급 당근은 나중에 주스용 당근으로 포장한다. 당근은 셀러리보다 훨씬 작고 가벼워서 비교적 몸이 편했다. 농장 워홀러들이 말하던 가벼운 작물이 좋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근 솔팅 과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렇다. 머신이 세척 당근으로 가득 찬 빈을 들어 올려 당근을 쏟아부으면 당근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쭉 올라와서 롤러 위로 굴러간다. 밀려오는 당근 사이에서 이상한 것들을 골라낸다. 멀쩡한 당근은 그대로 롤러를 타고 내려가 비닐 봉투에 담겨 자동으로 포장된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포장 상태를 앞뒤로 확인하고 바코드 스티커를 붙여 팔렛 위에 쌓아 올린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사람은 딱 2명이지만 이틀차 신입들을 감독하기 위해 경력직 워커가 한 명씩 붙어 총 4명이 되었다. 나는 솔팅으로, 다른 한 명은 마지막 스택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쉐드 안의 기차 화통 같은 소리가 당근 솔팅 기계에서 나는 것이었다. 태풍의 눈처럼 기계 한가운데에 서면 오히려 고요해지는 상황을 상상해 봤으나 실상은 기찻길에 온종일 서있는 것처럼 소리가 쉴 새 없이 귓전을 때렸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정말 헤드셋을 안 껴도 되는지, 청력에 문제되지 않는 건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제대로 골라내지 않으면 버려야 될 것들이 그대로 포장된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된 채로 일했다. 미처 빼내지 못한 당근이 그대로 포장되어 마트로 가고 그걸 산 손님이 컴플레인을 걸고 마트에서 농장에 패널티를 주고 그 영향으로 불시에 해고당하는 것까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데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빈에 담겨있던 당근을 다 골라내면 새로운 빈을 직접 가져와야 했는데, 같이 일하던 워커가 빈을 가지러 가서 혼자 남겨지면 마음이 급해져 천수관음이라도 된 것처럼 손을 놀렸다. 부러진 당근들을 마구 집어던지고 있으니 어느새 슈퍼바이저가 다가와 농장은 너무 많은 러비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골라낸 당근 중 몇 개를 세컨드 빈에 넣었다.
당근이 굴러가는 롤러 바로 위에는 꼼꼼히 보라는 뜻으로 작은 형광등이 달려 있었다. 흰 불빛 아래 굴러가는 당근만 두 시간 넘게 봤더니 쉬는 시간에도 눈앞에 당근이 둥둥 떠다녔다. 너무 많은 당근을 너무 가까이 봐서 정상적인 당근이 무엇인지, 내가 골라내던 게 당근인지 소시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농장 사람 중 절반은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그중 차가 있거나 픽업을 부탁할 만한 코워커는 딱 한 명이었다. 대만에서 온 니나였다. 스모코와 런치 브레이크 내내 니나의 주변을 맴돌다가 너 만다린어 하냐는 말까지 들은 후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간신히 픽업을 부탁했다. 거절할 거라는 우려와 달리 니나는 흔쾌히 태워주겠다고 했다. 픽업비는 단돈 2불이었다. 농장에서 일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기뻐서 고맙다는 말을 열 번쯤 했다. R팜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굴뚝같았지만 픽업이 해결되면 지금 일하는 농장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태산처럼 느껴지던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는 착실히 출근해서 88일만 채우면 됐다.
니나는 대만에서 온 샘과 함께 다녔다. 둘이 같이 호주에 왔는지 따로 왔다가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둘 다 이 농장에서 코로나까지 보낸, 경력이 몇 년이나 되는 고참 워홀러였다. 샘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대부분 만다린어로 말했다. 농장에 대만인이 많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퇴근길 차 안에서 둘이 만다린어로 신나게 수다를 떨거나 절절한 대만 발라드를 들을 때 나는 홀로 뒷자리에 앉아 약간의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미래를 위해 만다린어를 배워둘까 생각했으나 호주까지 왔으면 영어가 우선이지 않나 싶어 접어두었다.
퇴근길에 농장의 라인 단체방에 로스터-스케줄 표-가 올라왔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고 성적표를 받는다면 워홀러에겐 로스터가 있다. 일을 잘하면 로스터가 잘 나온다. 퍼포먼스가 좋지 않으면 언제든 잘릴 수 있다. 농장에는 니나와 샘처럼 몇 년씩 일한 워홀러도 있고, 워홀 비자를 다 쓰고 학생 비자로 전환해 일주일에 며칠만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처럼 비자 일수를 채우러 온 게 아니어도 다들 로스터를 보며 일희일비했다. 농장에서 포장하는 수많은 작물 중 일하기 쉬운 것과 아닌 것이 확실히 나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쨌거나 내일도 새로운 파트로 출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