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 워홀 일기 05
백수 생활이 길어지며 호주 계좌의 잔고는 점점 줄어들어 2주 치 방세와 생활비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한국 계좌에는 아직 환전하지 않고 남겨둔 약간의 돈-한국행 편도 비행기 표값-이 있었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것인지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한창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할 때 ‘농장에서 일주일만 늦게 연락이 왔어도 한국에 돌아갔을 것’이라던 블로그를 읽었었는데,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이야. 한참 동안 동네를 걸어 다니며 고민한 결과, 비자가 아까운 건 둘째치고 이대로 돌아가면 너무 쪽팔릴 것 같았다. 호주는 어땠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신나게 놀다가 돈을 쓴 것도 아니고 시골에만 있다가 일을 못 구해서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엔 자금이 모자랐고 당장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고쳐먹는 것뿐이었다. 오늘쯤이면 R팜에서 연락이 오겠지, 하는 느긋한 자세로는 부족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뭐든 하겠다는 절박함과 함께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그날부터 매일 아침 컨트랙터에게 문자를 돌렸다. 농장에 인력을 조달하는 컨트랙터들의 연락처는 지역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찾았다. 몇 년 전에 올라온 포스트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인사와 내 소개를 담은 장문의 구직 문자를 연락처 리스트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냈다. 지금도 내 휴대폰에는 그때 뿌린 메시지가 한가득 남아있다. 10명이 넘는 컨트랙터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일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중 한 컨트랙터가 자리가 생기면 연락할 테니 매주 문자를 보내줄 수 있냐고 물었고 필요한 디테일을 알려줬다. 디테일 정보를 추가한 문자를 새로 작성해서 계속 문자를 보냈다. 이제 더 이상 컨트랙터로 일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미친 사람으로 보는 거 아냐 등등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매일 연락을 받는 게 그 사람들의 일이라고 되뇌며 이겨냈다. 차가 없으니 농장에 찾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역 이름과 농장을 조합해 구글에 검색하고 홈페이지 Hiring 칸이든 이메일 주소든 나와있는 모든 연락처로 레쥬메를 보냈다. 뭘 다루는 농장이든 어떤 포지션이든 굴하지 않고 전부 지원했다.
그렇게 무한 지원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되기 전, 3곳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연락이 왔다.
본격적으로 일을 구하기 시작했던 6월 초는 구직에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날씨로 인해 지역의 작물 시즌이 밀린 데다 한국과 다른 호주의 회계연도도 한몫했다. 호주는 7월에 회계연도를 갱신하기 때문에 호주의 6월은 한국의 12월과 같아 사람을 잘 뽑지 않는다. 많은 연락을 받은 건 전부 절박함 덕분이었다. 컨트랙터 한 명은 문자로, 농장 두 곳은 이메일로 연락을 해왔다. 컨트랙터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3개월은 무조건 일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세컨 비자 신청에 필요한 기간과 맞아떨어졌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농장들은 백패커 사이에서 페이도 좋고 일도 쉽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O팜은 어떤 작물을 다루고 어떻게 일하는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월요일에 와보겠냐고 물었고, W팜은 곧 일할 자리가 생기니 관심 있으면 오피스 시간에 맞춰 와 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모두에게 가겠다고 답장했다. 첫 연락을 받았을 때는 금요일 오후 퇴근 시간 근처였다. 느긋한 호주 사람들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빨라도 월요일쯤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마구 굴러가서 컨트랙터와 O팜 모두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문자가 오갔고 월요일 첫 출근으로 이야기가 흘러가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컨트랙터는 월요일에 바로 합류할 사람이 필요해서 출근을 미룬다면 다른 사람에게 연락할 거라고 했다. 지금 많은 백패커들이 일을 구하고 있는데 농장에서 이번에 한국인을 몇 명 써보기로 해서 내가 뽑힌 거고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자 샐러드 농장이라는 말과 함께 대부분 쉐드 일이라는 답이 왔다. 비중은 몰라도 아웃사이드 일도 하게 된다는 걸 눈치껏 알아들었다. 컨트랙터 이름을 페이스북 페이지에 검색하니 힘들기로 유명한 M팜의 구인글이 나왔다. 스포츠 센터에서 만난 친구들도 거긴 좀 그렇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컨트랙터가 그 지역 농장들과 일할 뿐 내가 M팜에서 일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악명에 불안해진 나는 M팜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다. 하다못해 구글맵 리뷰까지 악평 일색이었다. 별점 1점과 함께 직원을 사람으로 대하라는 말이 남겨져 있었다. 내가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숨어있던 두려움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O팜은 이메일 끝에 적혀있던 매니저 번호로 문자를 보내 메일 잘 읽었고 최대한 빨리 일하고 싶은데 월요일 몇 시에 가면 되냐고 어필한 덕분에 토요일에 답장을 받았다. 매니저는 월요일에 농장으로 오면 인터뷰와 교육을 받은 뒤 바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O팜은 다들 가고 싶어 하는 농장이었지만 정보를 찾기 쉽지 않았다. 구글링 끝에 찾은 건 몇 년 전에 작성된 블로그 글 하나와 한 달 전 오픈채팅방에 올라온 O팜에서 일하는데 페이가 좋으니 지원해 보라는 글이 전부였다. 그 카톡을 읽었을 때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워홀러의 삶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다.
한 달 전의 나는 S팜과 R팜을 두고 고민하다 일이 쉽다는 R팜을 골랐고, 끝없는 웨이팅 지옥에 갇혔다. 웃기게도 이번 역시 몸은 힘들지만 일이 끊길 일은 없는 컨트랙터 잡과 여러모로 불안정하지만 꿀이라는 O팜을 두고 고민하게 됐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전의 선택에 교훈을 얻고 힘들지만 안정적인 일을 선택하겠지만, 나는 이번에도 꿀을 골랐다. 그 선택에는 기적처럼 구해진 픽업의 영향이 컸다.
컨트랙터는 나에게 일정 금액으로 픽업을 약속했지만 O팜에는 픽업이 없었다. 사실 픽업은 R팜-나를 웨이팅 지옥에 빠트린 그 농장-의 특이한 장점으로, 단체 계약으로 일하는 섬나라 사람들을 위한 출퇴근 버스를 워홀러들도 탈 수 있게 놔둔 것뿐이다. 농장에서 자체적으로 픽업을 제공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 면허도 없고 차도 없는 나는 R팜에서 일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이 지역을 골랐다. 차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출퇴근하는지 궁금할 사람을 위해 쓰자면, 대부분은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픽업을 부탁해 돈을 지불하고 차를 얻어 탄다. 전동 킥보드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문제는 첫 출근이다.
O팜의 매니저에게 농장까지 갈 차가 없는데 혹시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직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개인 정보여서 알려주기 곤란하다는 답이 왔다. 어떻게든 월요일에 출근하겠다고, 주말 잘 보내라는 말로 마무리한 뒤 픽업을 구하기 위해 인맥을 총동원했다. 스포츠 센터에서 만난 친구들은 밭에서 바깥에서 일하며 컨트랙터 차로 출퇴근했고 건너 건너 아는 사람 중 차가 있는 사람은 각각 다른 농장에서 일하는 중이라 월요일 출근 시간에 픽업을 부탁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택시를 부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이번에도 별 수가 없어 속는 셈 치고 올려본 곳에서 연락이 왔다.
호주에서 꽤 결집력이 강한 대만인들은 페이스북 지역 페이지와 라인 단체방으로 커뮤니티를 운영하는데, 한국은 오픈채팅방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중국인 친구 한 명도 같은 오픈채팅방에 들어와 있다는 걸 듣고 조금 놀랐다. O팜을 포기하고 컨트랙터에게 출근 확정을 지으려던 차에 픽업을 해줄 수 있다는 카톡이 왔다. 그러나 잠시 뒤에 채팅방을 헷갈렸다고, 자신은 사실 옆동네에 살고 그 동네에서 픽업을 구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O팜과 내가 사는 동네, 픽업 차주 분이 사는 옆동네는 나-농장-옆 동네 순으로 이어져 있어서 옆 동네에 살면서 나를 픽업하려면 출근에만 몇십 분이 더 들었다. 차주 분의 말로는 농장에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했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고 매달린 끝에 최대한 빨리 다른 픽업을 구하는 조건으로 월요일에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픽업비는 컨트랙터가 제시한 금액의 두 배였지만 출근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시간은 이미 밤중이었다. 컨트랙터에게 미안하다고 적당히 둘러대며 거절했고, 그 자리는 곧장 채워졌다.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으나 나중에 같이 살게 되는 룸메이트 언니가 그 농장에 들어가서 결과적으로는 전부 잘 풀렸다.
월요일 새벽. 첫 출근을 준비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불안함 속에서 픽업 차주 분이 나를 까먹었으면 어떡하지, 너무 멀어서 역시 못하겠다고 하면 또 기회만 날리는 셈인데 등등 최악의 최악까지 상상하며 진작 면허를 따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K마트에서 급하게 산 형광색 하이비즈 작업복을 입고 점심 도시락을 든 채 픽업 연락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약속한 시간에 차를 탔고 무사히 농장까지 갈 수 있었다. 출근길에 펼쳐진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길은 전동 킥보드를 살 마음을 뚝 떨어트렸다. 픽업을 구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형광색 옷을 입고 안전장치를 있는 대로 차면 킥보드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길에서는 형광옷이 아니라 형광등을 달고 다녀도 무조건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슈퍼바이저가 안내해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서야 해가 떴다.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들도 하나둘 도착했다. 새로 들어온 인원은 나를 포함해 여자 둘 남자 둘, 총 4명이었다.
악센트가 강한 매니저는 교육 내내 안전을 강조했다. 다른 사람이 지시했어도 만약 네가 들지 못하는 무게라면 옮길 수 없다고 말하라고, 일하는 사람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몇 번씩 당부했다. 새삼스럽지만 조금 신기했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 교육을 들을 때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한국에서는 할 수 없다, 못한다는 말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되게 만들어야 했다. 일하는 환경이 한국과 참 다르구나, 일하다 병원 갈 일 없도록 조심하자, 등의 상념과 함께 간단한 퀴즈를 풀어서 내고 R팜에서 받은 서류와 비슷한 종이를 한 뭉치 받아 챙겼다. 매니저와 바통 터치를 한 슈퍼바이저는 하이비즈 옷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무실에 있던 형광 조끼를 건네주고 우리를 쉐드로 안내했다. 물렁한 플라스틱 문발을 걷고 쉐드 안으로 들어가자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귀를 때렸다. 드디어 워킹 홀리데이 중 워킹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