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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있는 무대 Aug 14. 2020

내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해.

힘을 좀 빼면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어요

집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절정으로 치달았던 10대 때는 집만 아니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집은 통제와 규율이 있고 외로움과 분노를 유발하는 요인들이 정말 많았다. 성인이 되면, 집을 나가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거라 믿었다.


'부모는 00해야 하는데, 내 부모는 그렇지 않아.'

'집은 마땅히 00해야 하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


당위적 사고는 논리의 비약을 일으켜


'집만 나가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우리 부모는 언제쯤 바뀔까?'결론을 내렸다.


군대를 가고, 잠시 부모와 떨어진 시간 5년에 많은 걸 느낀다. 하지만 생각은 다른 주제로 바뀌어 반성은 없었다.


뜨거운 10대 신앙인이었던 내가 차가운 냉담자의 20대 신학교 학생 시절을 겪게 된 것은 교계의 현실에 비참함을 느꼈을 때였다.

'교회가 00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목사 전도사는 00 해야 하는데...'

'집사가 말이야.... 00해야 하는 데...'

나 빼고 보이는 모든 것들에 불만과 분노가 쌓였다.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분노를 느꼈다.  가끔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가

"왜 그리 분노를 해?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합리적인 이야기를 해줄 때 분노했다.

'답답한 이 현실에 교회의 제 구실을 못하는 것에 어찌 가만있으리오.'


교육의 기회가 닿아 연결된 서울 양재에 위치한 00 심리상담연구소 연구원으로 3년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일을 겪었다. 초기 6개월은 당위적 사고 즉, 비합리적 사고로 세상을 보는 일은 고쳐지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가...', '부모가...', '교회가...'

'학교가...', '여당 야당이...', 이 나라가...'


늘 문제를 찾았고 이 곳이 아닌 저곳은 괜찮을 거라고. 저쪽에서 보인 좋은 점은 크게 보이고 이쪽에서 보인 나쁜 점은 정말 크게 보였다.

 


늘 머릿속엔~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반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등 사고를 거쳤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사고는 삶의 맥락 여기저기 숨어있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많고 경험적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절대적이고 극단적으로 치우쳐 경직된 사고와 정서상태. 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행동과 마음 등은 외골수 꼰대 일중독자의 모습이었다.


이 사고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내 사고가 적절한 감정을 경험해보지 못했음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때에 맞는 정서, 상황에 맞는 정서, 적절한 정서를 경험해보지 못한 삶. 오로지 관념과 목적에 의해 움직여 감정과 삶에 대한 작은 조각들을 다 놓쳤던 삶이 살아온 흔적 속 남겨진 상흔의 기억들을 치유하기 시작할 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알지 못할 무언가가 있겠지. 존재의 이유'겠거니 여유가 생겼다.

어떤 방향으로든 팽창과 소멸을 반복하는 일생의 순간을 보고서 어찌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생각이 든다. 어떤 의견이든 내세울 수 있지만 그것이 존재 자체가 될 수 없음도 알게 되었다.


진실로 강한 사람은 본인의 약함을 인정하고 수용한다. 그만큼 타인의 약함을 포용한다. 약한 사람은 온갖 말과 위력으로 세를 과시하지만 수용하는 힘에 압도당한다. 비합리적인 사고, 당위적 사고를 가진 경직된 이들에게 평온과 휴식 그리고 좀 더 스스로를 수용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기 생각에 갇힌 이들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데 애를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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