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녀 아니면 살인자
태어나서 제일 후회하는 일이 뭐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것"
그렇다면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뭐야?
"내 아이들을 낳은 것"
만약 가장 후회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그 사람과 결혼한 뒤 아이들 낳고 똑같이 이혼할 거야. 안 그러면 지금 나한테 애들이 없을 거잖아"
캐리어를 끌고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 현관문을 열자 아무 소식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나를 보고도 무슨 일이냐며 걱정을 하는 식구들은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손주들, 증손주들 등장에 나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온 가족들이 두 아이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참 동안 아이들을 안고 반가워하는 가족들을 보고 있다가 행복을 깨트리는 한마디를 던졌다.
"나 이혼했어"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엄마는 콧웃음을 치더니, 싸웠으면 화해를 해야지 갑자기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하냐며 나무랐다.
"그냥 집에서 며칠 쉬다가 가"
엄마의 말에 그날은 더 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택시로 한 시간이면 오는 집인데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도착한 것처럼 너무 지쳤다.
그리고 그제서야 남편에게 맞은 곳이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외할머니 방에 들어가 할머니 침대 위에 누웠다. 나는 성인이 돼서도 악몽을 꿀 때면 할머니 방으로 뛰어들어와 할머니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 머리맡에 성경책을 놔주시고, 손으로 내 몸을 천천히 쓸어내려 안정을 주셨다. 익숙한 할머니 냄새를 맡자 편안함이 몸을 감쌌다.
그토록 그리웠던 우리 집은 가구 하나 없이 창고처럼 뭔지 모를 물건들만 이리저리 쌓여있는 내 방 하나만 빼고 변한 게 없었다. 모든 게 결혼 전 그대로였다.
마음은 평온한데 복잡한 감정이 북받치며 눈물이 흘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밖에서 웃으며 재롱을 피우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 순간부터 앞이 막막했다.
3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했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부부'라고 배웠는데 실전은 그렇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까지 가슴 절절하게 사랑했던 첫사랑과 이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순순히 부모의 말을 따르는 착하면서도 미련한 선택을 했다. 30살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나서 엄마 뒤통수를 치려다 발목 잡힌 새아빠는 이 결혼을 반기며 앞장서서 주도했고, 평범하게 살라며 남편과 동거부터 시켰던 엄마는 몇 달 만에 쥐어터지고 기절해 병원에 실려온 날 보고도 침묵했다. 애 둘을 낳아놓고 혼자 몇십만 원이라도 벌겠다고 밤이면 호프집에서 서빙을 했다. 바로 어제까지도.
그리곤 오늘 아침 또 폭행을 당했고, 남편에게 이혼서류를 내밀고 집을 나왔다.
그런 가파른 일들 사이 속, 나는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이 정도면 족히 이혼의 사유가 되긴 하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과하게 받아들이고 성급하게 서류를 들이밀었던 건 아닌지.
이번에도 엄마가 또 나를 돌려보내서 다음번엔 맞다가 내가 죽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두들겨 맞다가 내가 결국 그놈을 죽이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의 끝에서 난 남편을 어떤 방법으로 죽일지 차례차례 계획을 세우며 이혼녀에서 슬그머니 살인자를 꿈꾸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엄마에게 떠밀려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다.
놈팽이처럼 집에서 빈둥대는 남편에게 매 맞는 아내로 살고 싶지도 않고, 살인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아이들을 지키고, 키워내야 한다. 난 엄마니까.
할머니 침대 옆 협탁 위에 늘 놓여 있는 낡은 성경책을 끌어안았다.
'하느님, 이 지옥을 이제 제발 끝내주세요.'
나는 방금 지옥문을 열고 막 불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그런데 또 다른 지옥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