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듯 끝나지 않았던..
엄마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주고 오라고 했다.
그래야만 날 다시 받아주겠단다.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엄마는 이혼하자마자 새아빠를 집에 들였고, 밤장사 하는 딸을 애달프게 여긴 외할머니가 우리 둘을 맡아 키워오셨다. 본인은 친정 엄마의 손을 빌려 아이들을 키웠을지언정, 내 딸의 자식들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날 받아주다니? 내가 무슨 죄라도 짓고 친정에서 쫓겨난 딸이었던가?
애들이 없어야 새로 시집가기가 수월하다고 믿는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 시집 따위 갈 리가 있나. 그 끔찍한 것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물건 취급하듯 아이들을 도로 갖다 주라는 말을 행여 아직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이 듣기라도 했을까 봐 불안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남편에게 매를 맞는 아이들을 상상했다.
온몸의 세포가 뾰족이 솟아 가슴을 찔러댔다. 상상만으로도 아프고 끔찍했다.
니가 무슨 수로 애 둘을 키울 거냐며, 분명히 얼마 못 가 못 버티고 애들을 포기하게 될 거라던 말들도 비수가 되어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엄마의 예언이 틀리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난 억척스러워져야 했다.
한 두 달 정도 지났을까, 시어머니가 조심스레 다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전화로 물어오셨다. 그럴 일은 절대 없다는 내 단호한 대답에 적잖이 당황을 하셨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간 시부모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곧이곧대로 알겠다고만 하던 착하고 어린 며느리였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서류를 접수했다며, 짐이나 가구를 어떻게 나눌 건지 만나서 상의해 보자는 연락을 받고 친정에 온 이후 처음으로 남편을 만나기 위해 그 집에 어렵게 발을 디뎠다. 아이들 밥을 먹이다가 맞고 날아간 기억이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생생하게 떠올라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렸다. 날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좁아터진 아파트에 단둘이 있다는 자체가 공포스러워서 현관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이건 어떻게 할 거야? 가져갈 거야? 또 이건?"
마지막으로 보일 자상한 남편의 모습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했던 건지,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이 집에서 경험했던 기억들과 교차되며 속이 울렁거렸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각자 나눠 가질 것에 보이지 않는 찜을 했다.
거실을 마지막으로 훑어보던 중 협탁 한가운데 보란 듯이 놓인 그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앞으로 저 기계를 만지작 대는 꼴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했다.
그리곤 얼마 뒤 재판에 출석했다.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법원 앞에 도착해 보니 굳은 표정의 사람들이 잇고 있는 끝도 없이 긴 줄이 보였다. 이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긴 기다림에 비해, 판사 앞에서 "네" 한마디로 몇 분 만에 싱겁게 끝이 났다. 이제 폭행을 당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너와 나는 더 이상 한집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나에게 이제 남편 따위는 없다는 걸 실감할 새도 없이.
"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있어서.. 잠깐 같이 어디 좀 가주면 안 될까?"
커피 한잔 마시자고 붙잡는 것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남편이 쭈뼛거리면서 꺼낸 말이었다. 다 끝났는데 어디를 가자는 걸까? 같이 택시를 타고 한참 달려 내린 곳은 어느 보험회사 앞이었다.
첫째를 낳았을 때 시아버지가 큰아이 앞으로 보험을 들어주셨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 들어가기전까지 20년간 부으면 꽤 될 거라고 흡족해하셨었다. 비록 더는 아버지가 못해주지만 아이를 위해 앞으로 꼬박꼬박 잘 부어 미래에 보탬이 되라고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아버지는 재판날 나와 만나는 김에 28개월간 부어왔던 보험을 깨서 해약금을 받아오라고 남편에게 시킨 것이다. 그때는 엄마가 직접 보험회사를 방문해야만 해지를 할 수 있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먹고 떨어지라는 말이 목구멍 밑까지 올라왔지만 이 조차 남편과 나의 마지막이었기에 쿨한 아내의 모습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했다. 덤덤한 척 엄마 서명란에 모두 도장을 찍어주고, 내 통장으로 들어온 해약금을 현금으로 꺼내 건네주었다.
내 도장은 공증서류에 남편이 무직자라 양육비를 주지 않겠다는 항목에도 찍혀 있었다. 양육비를 못주는 대신 어느 정도 위자료로 끝내자는 시아버지의 판단이었다. 나는 아이들만 준다면 상관없다며 도장을 찍었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우리에겐 위자료 문제가 남아있었다.
약속된 금액에서 자꾸 2천만원을 깎아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직접 말하기 곤란했던지, 며칠 뒤 그 이유를 시어머니가 대신 얘기해 주셨다.
상상치도 못한 얘기였다.
엄마가 나 몰래 시어머니에게 2000만원을 받아내서 다단계 회사에 넣고, 몇 달전 부터 돌려달라고 해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주저앉는 느낌이었다.
그때서야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내 방에 쌓여있던 물건들이 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