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좋은 추억이 많았더라면…
할머니와 함께 산 세월이 25년이 넘지만 내가 출가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후에야 들을 수 있었던 할머니의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 이야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중학생 때 6.25를 겪은 할머니.
어찌어찌 중학교까지는 마쳤지만 공부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공부해서 교환원으로 취업하는 것을 꿈꿨으나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이나 가면 되지 무슨 취업이냐는 무서운 아버지의 만류로 도전하기도 전에 포기해야 했다.
그 후 중매쟁이의 소개로 결혼하게 됐는데 그야말로 사기결혼 그 자체였다. 꽤 괜찮게 산다던 집은 떡장사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던 집이었고, 남편은 놀음쟁이로 맨날 밖으로 나도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임신한 몸으로도 매일같이 떡메를 치고 떡이 든 소쿠리를 지고 장에 나가야 했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다 짙무를 정도로 밤낮없이 고생했지만 그저 당연히 여기는 시집식구들이었다.
결혼식을 올리는 날 손가락에 잠시 꼈던 백금 반지는 그날 시어머니가 가져간 이후 어디로 갔는지 구경도 할 수 없었고, 친정에 일이 있어 하루 간다는 것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팔 남매 중 맏이인 할머니의 동생들은 언니(누나)가 보고 싶을 때마다 몰래 찾아와 대문 사이로 훔쳐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날에는 할머니에게 돈을 주고 갔을까 봐 방을 샅샅이 뒤지고, 본인 아들이 애기라도 안는 날에는 큰일 나는 줄 알고 할머니에게 소리소리 지르곤 했다는 시어머니.
만삭이던 어느 날엔 너무 배가 고파 계란 6개를 삶아 장롱 안에 숨겨 두었다가 모두 잠든 밤 물도 없이 한꺼번에 허겁지겁 먹으며 설움을 삼켜야 했다.
놀음하느라 집에도 잘 오지 않던 할아버지는 놀음할 돈을 대주는 여자와 바람까지 나서 얼굴 보기 더 힘들어졌지만 시댁 식구 누구 하나 할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와중에 애를 넷이나 낳았다는 점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다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식을 넷이나 낳은 거야?” 하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집에 들어올 땐 다정했어. 내 생일엔 꼭 들어와서 챙기고.. 그런 거 하나로도 버틸만했었어.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이혼해 달라니까 그건 또 안된다는 거야”
십수 년간 그저 참고만 있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친정으로 도망쳐 온 할머니. 시집식구들은 할머니의 살림 중 돈 되는 것은 다 빼놓고 나머지만 친정으로 돌려보내며 끝까지 모든 책임을 할머니에게 돌리며 표독스럽게 굴었다.
얼마 후 할머니를 찾아온 할아버지의 애원에 결국에는 다시 함께 살기로 했지만 적어도 시집살이에서만큼은 해방될 수 있었다.
그 후 몇 년 안돼서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셨다. 부부간의 깊은 정은 없었어도 할아버지의 죽음은 할머니에게 큰 충격이고 아픔이었다. 진짜로 혼자가 되었다고 느꼈다.
“손 한번 잡고 길거리에서 데이트해 본 기억이 없어~ 그런 기억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어. 사랑받아 본 기억이 없어. 근데도 일찍 나 만두고 가버려서 원망스러워”
그렇게 40대의 나이에 혼자가 된 할머니.
덤덤한 척 내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 슬퍼 보였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의 할머니로 써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같은 여자로서 너무 안쓰러워 마음이 아렸다.
사랑받은 기억이 있었더라면, 함께 한 추억이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 거 같다는 할머니. 그날 나는 마땅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할머니의 두 손을 한참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