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by 지금


몇 년 전쯤 다이어트를 해보겠다고 한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한의원에서는 기본 진료와 함께 홍채 인식을 통해 자율신경균형 검사까지 진행해 줬다.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에 들어가 상담을 하던 중 선생님이 내게 다이어트를 권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자율신경균형 검사지에 나온 모든 결과가 매우 나쁨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율신경 활성도, 균형도, 스트레스 저항도, 스트레스 지수, 피로도, 심장안정도까지 모든 것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상태라고 했다. 신경정신과 정밀 검사가 필요한 거 같다며 마음이 좀 나아진 후에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따뜻한데 양심적이기까지 한 선생님을 만나 한의원에서 약은 못 짓고 뜻밖의 위로만 받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제대로 된 검사를 다시 받아야 했으나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그 당시엔 24시간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사실 이건 핑계고 스무 살 무렵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복용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신경정신과 방문이 더욱 꺼려졌다. 치유하러 가서 더 큰 상처를 받은 꼴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병원을 가는 대신 이따금씩 한의원에서 받은 결과지를 들여다보며 '그래 내 상태가 별로 좋지 않구나, 나 힘들구나'를 스스로 자각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봐야 그제야 내가 아팠구나 실감하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임을 알게 됐다.


어릴 땐 마음이 괴로우면 원망의 대상을 떠올리며 속으로 저주를 퍼붓거나 끝도 없이 미워하는 것이 위안이 됐다면 이제는 아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더 견디기 괴로울 때가 많다.

왜일까. 마음 그릇이 커진건가 아니면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건가.


나이를 먹을수록 원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자꾸만 미안한 사람만 늘어간다. 나를 두고 간 엄마, 내게 무거운 짐을 지어준 가족들, 가끔 나를 울게 하는 남의 편, 상처를 주고 떠나간 나의 수많은 인연들.

내가 아는 것, 내가 느끼는 것만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밉다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다. 미안함의 이유를 굳이 더 찾아본다면... 아마도 내가 그들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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