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할아버지

by 지금


첫째 아이가 네 살 무렵의 일이니 8년도 더 된 이야기다.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어느 할아버지를 만났다. 오랜 시간 서 있어 힘들어하는 아이를 노약좌석에 앉혀두고 서있었는데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속 우리 가족을 유심히 쳐다보시다가 말을 걸어오셨다. 그렇게 시작된 스몰토크.


"애기 엄마! 아이가 너무 예쁘네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실례가 안 된다면 한마디만 해줘도 될까요?. 내가 관상을 볼 줄 알거든요"

"아.. 네? 네"

그 순간 갑자기 경계심이 확 올라오면서 '도를 믿으세요 그런 건가' 하고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거절 못하는 나는 왕년에 도믿걸에게 잘못 걸려서 봉고차로 끌려가 납치당할뻔한 이력이 있다.)


이런 내 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난 건지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딸내미는 크게 되겠어요. 체조나 운동 쪽으로 시키면 나중에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선수가 될 수도 있겠어요. 부부가 협심해서 잘 키워봐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수상해 보일 수 있겠지만 꼭 얘기해주고 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애기 엄마가 인상이 너무 좋네. 복이 많은 얼굴이야. 초년에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현명해서 지혜롭게 잘할 거예요."

그리고는 남편을 바라보시다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씀하셨다.

"고집이 세죠? 많이. 아내가 이해해야 할 일이 많을 거예요. 힘들겠어. 근데, 잘 살 거예요. 둘이는"


할아버지는 말을 이어가는 내내 부담을 줄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는 사람같았다.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느닷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관상을 봐주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셨다.


어쩌다 마주친 할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나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관상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얼굴만 보고 그 사람의 많은 것을 꿰뚫어 본다는 게 놀라워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튼. 마치 나를 아는 사람인 듯 순식간에 내 상처까지 들여다보고 따뜻한 말을 아끼지 않은 할아버지께 감사해서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것밖에 없어서 아쉽네 하면서 주머니에 있던 4천 원을 꺼내 아이에게 건네셨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거절했지만 나중에 아이가 잘 되면 자신의 말을 떠올려 달라며 우리와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내리셨다.


뭐지. 꿈꾼 건가. 남편과 나는 한동안 멍 한 채로 신기루처럼 사라진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사느라 바빠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아이가 느닷없이 태권도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시장을 지나다닐 때도 정육점 아저씨의 우렁찬 인사가 부담스러워 엄마 등 뒤로 숨던 아이가 갑자기? 태권도? 의아했지만 하고 싶다 하니 태권도에 데려갔다.

관장님은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아이가 하도 말을 안 하고 있으니 진짜 아이가 태권도를 하고 싶다고 한 게 맞냐고 내게 물었다.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끌려온 건 아닌가 하는 관장님의 걱정 어린 말에 왠지 마음이 놓여 그날로 태권도를 등록해 버렸다.


아이는 그 후로 6년 넘게 태권도를 다니고 있고 도장의 얼음 공주이자 나름 촉망받는 에이스로 등극했다. 바쁜 학원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태권도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차라리 학원을 끊겠다는 말로 엄마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아이는 품새 국가대표 이주영 언니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운동분야는 1도 모르는 엄마로서 그저 묵묵한 응원을 할 뿐이다.


무슨 복인지는 몰라도 복은 있지만 힘든 팔자를 타고난 나와, 고집은 좀 많이 세지만 그래서 웬만하면 잘 포기하지 않는 남편. 우리 둘은 숱한 위기가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


살면서 문득 그때의 우연한 만남이 떠오를 때가 있다. 위로가 필요했던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 낸 신기루 같았던 만남. 지금 생각해 보니 말끔한 신사 정장을 입고, 갈색 페도라를 쓰고, 안경을 낀 모습이 꼭 나태주 시인을 닮았던 할아버지.


건강하시겠지?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생각날 나의 귀인.

오늘 나의 감사가 텔레파시로 전달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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