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53일

by 은은


林踈空自籟(임소공자뢰) 듬성한 숲 사이로 바람 소리 절로 울리고

雨細不成泥(우세불성니) 빗줄기 가늘어 질퍽대지 않네

墮羽爭巢雀(타우쟁소작) 참새는 깃을 접고 다투어 둥지 찾고

申吭叫屋雞(신항규옥계) 닭은 목을 빼어 지붕에서 운다

飯殘飢鳥喜(반잔기조희) 밥을 남겨 주니 주린 새 좋아하고

釀熟亂蜂多(양숙난봉다) 술이 익으니 벌 떼가 설친다.

小圃雨初過(소포우초과) 조그만 채마밭에 처음 비 뿌리니

香蔬添幾何(향소첨기하) 향긋한 나물 얼마나 더 자랐는가

掃地林餘影(소지임여영) 마당 쓸어도 숲 그림자 남고

鋤園樹礙根(서원수애근) 정원을 매니 나무 뿌리 걸린다.

人閑如老衲(인한여로납) 사람이 한가하니 늙은 스님 같고

地僻似山村(지벽사산촌) 사는 땅 외져서 산골 같구나

曲塢花迷眼(곡오화미안) 굽은 언덕엔 꽃이 피어 눈이 어릿하고

深園草沒腰(화원초몰요) 그윽한 뜰엔 풀이 허리까지 오네

霞殘餘綺散(하잔여기산) 엷은 노을은 비단이 흩어진 듯

雨急亂珠跳(우급난주도) 세찬 비는 구슬처럼 어지러이 튕긴다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또 절구(5언 4구)의 운자를 빌려 시를 짓다[우차절구(又次絶句)]>


저희 교육원은 주말이나 연휴를 보낸 뒤 아이들이 입교하는 시간이 11시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부모님과 아이들이 일찍 도착하는 경우도 있기에 도착 1시간 전부터 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교육원 앞마당에서 파견 교사들이 늘 대기를 하게 됩니다. 보통 월요일 입교 후 오후 프로그램은 저희와 상호 협정을 맺은 지역의 상담센터에서 강사분을 파견하여 도박·약물 오남용·스마트폰 및 인터넷 과의존 예방 교육, 학교폭력 예방 및 흡연 예방 교육, 청소년 노동 인권 교육, 장애 인식 개선 교육, 경제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소위 단위 학교의 창의적 체험활동 중 자율 활동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짧게는 1교시, 길게는 2교시 정도 교육을 실시하고 나머지 3, 4교시는 같은 기관에 소속된 상담 선생님께서 집단 상담을 하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치유하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창체와 상담 프로그램을 지역의 상담센터와 협정을 체결하여 운영하고 있는 셈입니다. 공교롭게도 추석 연휴 뒤의 요일이 마침 수요일이라 상담 및 창체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어 공동체 형성 프로그램을 사전에 기획하였습니다. 동네 뒷산 트래킹과 족구를 하며 상호존중과 배려심, 규칙 준수, 공동체 활동의 중요성을 익히는 유의미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남학생 대부분이 몸의 움직임이 많은 활동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활동을 하면 할수록 둥글게 맺히는 땀방울만큼 환한 미소와 편안함을 아이들의 표정에서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규보의 한시 <가랑비 지나고>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옛말에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들어 있다[시중화 화중시(詩中畵, 畵中詩)]”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요? 이 시를 보고 있노라면 시각, 청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운데 숲과 시골 풍경이 함께 떠오르지 않나요?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숲, 바람 소리, 빗줄기, 참새, 둥지, 닭이 우는 소리, 벌 떼, 채마밭(채소를 심어 놓은 밭), 나물, 정원, 언덕, 풀, 노을, 구슬 등 시골살이의 모습을 참 정겹고도 세밀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밥을 남겨 주니 주린 새 좋아하고’라는 구절에서는 먹거리 나눔을 통한 생명사랑의 실천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양의 경전이자 고전인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는 ‘살아 있는 뭇 생명들을 살리는 이치[생생지리(生生之理)]’라고 해서 일찍이 생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학자이며 문장가인 農巖(농암) 金昌協(김창협, 1651~1708)은 미물(微物: 인간에 비해 작고 보잘 것 없는 동식물)에 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高蔓摘未盡(고만적미진) 높이 달린 것은 다 따지 않고

留作鼪鼯糧(유작생오량) 다람쥐 먹이로 남겨둔다네

- 과일을 따다[摘果(적과)]


선현들은 다람쥐, 까치, 까마귀, 들쥐, 닭, 토끼, 고양이, 개, 소, 말 등 집에서 키우는 동물이든 밖에서 생활하는 들짐승과 날짐승이든 구분하지 않고 똑같은 생명을 지닌 개체로서 존중하고 배려하며 돌볼 줄을 알았습니다. 이들과 공존할 줄 아는 지혜가 곧 자신과 지구 생명공동체를 살리는 길임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의 배를 조금 더 불리기보다는 내가 조금 적게 먹더라도 이웃과 사회를 위해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생명 존중의 넉넉한 마음씨와 친절, 품격이 베어있는 생활을 실천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물과 생명에 대해 애정이 없다면 위와 같은 시어나 자연의 모습을 담은 시 또한 나오지 못했겠지요. 또한 생명에 대한 감수성, 생태에 대한 정감 어린 시선과 공감하는 마음이 없다면 시적 마음 또한 발현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는 그 시대의 문화와 지역, 풍속,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그릇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접할 때 마음이 편안하듯이 내가 평소 담고 있는 말의 씨앗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도 결국 우주 대자연의 극히 일부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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