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54일

by 은은


萬物本一(만물본일) 만물은 본래 하나였는데

形分故礙(형분고애) 몸이 나누어지면서 서로 단절되었네

形礙於外(형애어외) 몸은 밖에서 단절되고

覺局於內(각국어내) 정신은 내부에 갇혀

則物我不相通(즉물아불상통) 나와 남이 서로 통하지 않게 되어

而私遂立焉(이사수립언) 마침내 이기심이 생겨났네

好惡相奪(호오상탈) 그리하여 좋고 싫음에 따라 서로 빼앗고

利害相攻(이해상공) 이익과 손해에 따라 서로 공격하여

爭以是滋(쟁이시자) 이 싸움이 번지고

亂以是起(난이시기) 혼란이 야기되었으니

此仁人之所惻也(차인인지소측야) 참 측은한 일이다.

勝私則(승사즉) 이기심을 극복하면

形不爲礙(형불위애) 몸이 장애물이 되지 않고

循理則(순리즉) 순리대로 하면

覺無所局(각무소국) 정신이 갇히지 않을 것이니

物猶我也(물유아야) 그러면 남이 내가 되어

我猶物也(아유물야) 내가 남이 되어

萬物一府(만물일부) 만물이 하나의 틀 안에 들어오고

死生同狀(사생동상) 삶과 죽음도 같은 것이 될 것이네

- 장유(張維, 1587~1638), <방언(放言)>


늦은 기상을 해보니

교육원 둘레 은행나무 가지 끝에

마치 박쥐가 날개를 편듯

어릴 적 잠자리채 포집망을 연상시키듯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있는 모습에

경건함과 엄숙함을 느낍니다.


자욱한 물안개는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에둘러 일러주고

조금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니

옅은 주홍빛 감은

마치 감귤이 연상되는 아침입니다


가벼워진 탁상용 달력을 보며

올 한해도 얼마 남지 않음을

미움과 원망, 회한과 쓸쓸함

미안함과 아쉬움을 잘 다독이고

남은 시간을 내실로 채우며

잘 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만물과 내가 하나’라는 주장에 동의하는지요? 기후와 문명의 위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장유의 첫 문장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풍깁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우리 몸은 외부와 통하질 못하고 나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정신은 안으로 갇혀 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왜 막히게 되었을까요? 몸과 정신이 막히고 통하지 않게 된다면 살아는 있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몸과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유는 그 방법으로 개인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자연의 이치를 따르면 된다고 말합니다.


현대는 소통과 관심의 과잉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와 함께 있어도 몸만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 정신은 늘 스마트폰을 향하곤 합니다. 내가 올린 글이나 사진이 타인에게 ‘좋아요’, ‘추천’을 받지 못하면 왠지 모르게 소외된 것 같고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침묵의 가치가 더 빛을 발휘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장유는 그의 침묵 예찬[默所銘(묵소명)]이란 글에서 침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온갖 묘함의 근원으로는

침묵만한 것이 없네

영악한 사람이 말할 때

소박한 사람은 침묵하고

조급한 사람이 말할 때

차분한 사람은 침묵하네

말하는 사람은 수고롭고

침묵하는 사람은 편안하며

말하는 사람은 헤프고

침묵하는 사람은 아끼며

말하는 사람은 다투고

침묵하는 사람은 여유가 있네


말을 많이 할 수 있지만 내면의 간소함과 소박함, 나의 덕을 키우고 정신을 기르는 데에는 침묵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어른인 법정 스님은 “말이 많아서 실수가 많지 말을 적게 해서 실수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라고 하며 생전에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늘 강조하곤 하였습니다.


침묵할 수 있을 때만이 자기 내면이 소리와 우주가 들려주는 신비한 자연의 이치를 더욱더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이자 신유학의 기초를 닦은 장재(張載, 1020 ~ 1077)는 자신의 자리 오른쪽에 새긴 글[〈서명(西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아버지라 칭하고 땅을 어머니라 부르니, 백성들은 나의 동포이고 사물은 나와 함께 하는 것들이다. [乾稱父, 坤稱母, 民吾同胞, 物吾與也(건칭부, 지칭모, 민여동포, 물오여야)]


우리가 하늘과 땅을 부모로 여기고 사람들과 우주 대자연을 나와 평생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서로를 귀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당시의 주류 사상인 ‘인간의 본성이 우주 자연의 이치’라고 주장한 주자학에 의문을 제기하며 ‘내 마음이 우주 자연의 이치’라며 마음의 중요성을 밝힌 명나라의 교육자이자 사상가인 왕양명(1472~1528)은 <대학문(大學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인(大人)이란 천지와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는 사람이다[大人者 以天地萬物 爲一體者也(대인자 이천지만물 위일체자야)]


장유, 장재, 왕양명과 같은 사상가이자 내면의 달인들은 나와 타자(사람, 동식물, 자연 등)를 구분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정신이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좀 더 큰 나가 될 수 있고 우주 대자연과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주 대자연과 내가 하나인 상태가 될 수 있을 때라야 삶은 곧 죽음의 시작이며 죽음은 삶의 시작이라는 자연의 순리를 깨닫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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