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일
勿履生草(물리생초) 살아 있는 풀을 밟지 말고
勿踏生蟲(물답생충) 살아 있는 벌레도 밟지 말라
勿折方長(물절방장) 바야흐로 자라거나
勿除方茁(물제방촬) 움돋는 것을 뜯지 말라
物亦好生(물역호생) 사물 또한 살기를 좋아함에
君子敷化(군자부화) 군자는 베풀어 살려야 하느니
- 이황(1501-1570), <풀과 꽃을 꺾거나 해침을 경계하며[계절제(戒折除)]>
입동 시작 열흘 전인 오늘부터 동지 이틀 전까지 교육원 4기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3기 때의 활발했던 학생들보다는 주로 정적이며 우울감을 가진 아이, 이로 인한 자살 충동을 가진 아이, ADHD 약물을 복용하는 아이, 우울감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살이 쪄서 당뇨약을 먹는 아이 등 아이들의 면면 또한 다양하여 이번 기수는 정신적, 정서적으로 많은 돌봄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는 주 5일을 교육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숙 생활을 한 후에 아이들은 금요일 점심을 먹고 하교를 하고 저희는 전체 회의를 가진 후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반려견을 데리고 동네 뒷산 산책입니다. 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분홍빛 코스모스 몇몇이 자신을 보라는 듯 키 큰 몸집에 자그마한 얼굴을 비칩니다. 둘레에 시선을 기울이니 파스텔 톤의 분홍빛 구절초와 같은 빛깔의 호랑나비를 부르는 메리골드가 한켠에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한 낮의 햇살과 함께 마음 한켠이 따스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메리골드의 꽃말 또한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을 뜻한다고 하네요.
미물(微物)은 꽃, 벌레, 풀, 나무, 새 등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작고 하찮은 사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왜 미물과 이들의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딛고 사는 환경이 이들과 뗄려야 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이들 또한 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물이 없다면 인간의 내적 가치를 드높이는 심미·생태적 감수성, 배려심, 생명 존중, 땅과 돌봄에 대한 인식 또한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교육원 꽃밭에 작은 뱀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입교하는 학생들을 받느라 보질 못하였는데 시설 담당 주무관님께서 삽으로 이 친구의 목을 찍어 죽였다고 하니 왠지 마음이 좋질 않았습니다. 당장에 사람을 해친 것도 아닌데 우리의 혐오감과 막연히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명을 해쳐도 된다는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살아 있는 풀을 밟지 말고/살아 있는 벌레도 밟지 말라”는 퇴계의 금언(金言, 삶의 본보기가 되는 짧은 문구)은 언젠가는 나 자신이 풀이자 벌레의 입장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미물이 하찮아 보이지만 ‘우주 지성’ 혹은 조물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 같은 지구 생태계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자 존재의 이유와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소중하듯 미물에게도 존중과 배려, 친절과 환대를 똑같이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말 못하는 짐승이나 풀벌레, 나무, 뱀, 나무와 식물, 곤충과 같은 생명이라면 더더욱 친절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