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羡子明農志(선자명농지) 농사 이치 밝은 자네 부럽고 부러우이
孤筇日涉園(고죽일섭원) 막대 하나 짚고서는 날마다 동산을 거니네
野童驅雀卧(야동구작와) 들에선 아이놈이 누운 채로 새를 쫓고
溪叟趁魚喧(계수진어훤) 시내에선 늙은이가 고기를 쫓아 소리치네
牆栗跳紅殼(장율도홍각) 담장 옆 익은 밤은 붉은 껍질 벌어지고
畦菁抱紫根(휴정포자근) 채소밭 순무는 밑동 붉게 물들었네
朱朱擲紅粒(주주척홍립) 모이를 뿌리면서 쭈주 소리치며
霜旭招鷄孫(상욱초계손) 병아리를 부르는군 서리 내린 아침녘에
- 이덕무, <밤에 조촌에 사는 지숙의 집에 가서 심계, 초정과 같이 짓다[야도조촌지숙가 동심계초정부(夜到潮邨智叔家 同心溪楚亭賦)] 3수 중에서>
이 시는 1776년 가을 집안 조카 심계(心溪) 이광석(李光錫),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에 함께 몸담고 있는 벗인 초정(楚亭) 박제가와 함께 시골 친구의 집에서 읊은 노래입니다. 심계와 초정은 각각 이광석, 박제가의 호입니다. 호는 보통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을 따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호로 삼기도 합니다. 조촌에 사는 지숙은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첫 구는 ‘농사 이치 밝은 자네 부럽고 부러우이’로 시작합니다. 농사의 이치는 무엇일까요? 하늘과 별을 올려다보고 바람과 고개 숙여 땅의 냄새를 맡으며 매일매일의 기후를 예측합니다. 새벽같이 논이며 밭으로 달려가 오늘은 어떤 작물이 안색이 안 좋은지 어떤 거름을 더 주어야 할지 넘어지면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할지 등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이런 일들을 오래도록 능숙하게 큰 힘 들이지 않고 ‘막대 하나 짚고 날마다 농산을 거니는’ 벗을 보고 이덕무는 많이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조금 오래된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지숙과 같은 분들이야말로 ‘농달(농사의 달인)’이며 그의 모습에서 삶의 여유와 부지런함을 엿보게 됩니다.
예부터 아이와 노인은 농촌의 주요한 일손이었습니다. 저의 고향은 경남 합천이지만 아쉽게도 도시에서 나고 자는 바람에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거나 약초 캐러 다니거나 모내기, 벼 베기 등의 경험이 없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농촌 일손 돕기’라고 해서 여름 방학 때 ‘농활(농촌활동)’을 가는 선후배님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과 방황으로 그런 활동을 하지 못했던 게 마냥 아쉽습니다.
저희 아버님 세대만 해도 어릴 때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습니다. 어린 마음에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하러 가거나 소 풀 먹이기가 싫어 고향 마을 앞 나무 위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고 놀았던 추억을 지난 추석 전 벌초하러 갔을 때 들었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 있는 외가에 부모님, 동생과 함께 가서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는 ‘음메’하고 사람을 반기는 소의 울음소리와 부뚜막에서 이모할머님께서 장작을 떼어 밥을 지으시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냄새, 시골 동네를 수호신처럼 지켜주는 수령이 몇 백년된 고목나무 둘레에서 사촌들과 술래잡기 하며 뛰어놀던 일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새롭게 피어오릅니다.
마당에는 아이들과 함께 신이 나서 뛰놀던 누렁이와 ‘꼭꼭꼭’하며 울어대던 시골 장닭들, 외양간들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계곡에서 한 아이가 족대로 냇물의 길을 막으면 여러 명이서 피라미와 미꾸라지를 잡던 일들, 아이의 얼굴말한 돌을 뒤집어 가재와 고동을 잡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농업과 농민, 농촌은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며 산소가 있고 논밭과 과실수, 산과 계곡, 돌과 나무, 새와 온갖 산짐승과 식물들이 함께 사는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 삼농(三農)이 무너진다면 속도와 편의 위주의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의 마음밭이 발붙일 곳이 있을까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종의 다양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는 코로나가 인간에게 급속도로 확산된 이유로 종의 다양성 상실을 꼽고 있습니다. 과장된 얘기이긴 하지만 채소밭 순무가 붉게 익어가는 모습, 붉게 벌어진 잘 익은 밤과 석류, 버섯과 각종 약용 작물들, 호두나무, 노란 꽃잎을 자랑하는 호박꽃, 노란 나비, 흰 나비, 호랑나비, 채송화, 봉선화, 맨드라미, 자홍빛, 흰빛, 주황빛, 분홍빛 등을 자랑하는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의 모습을 우리가 지켜나가고 보존해 나갈 수 있을지 두렵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