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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Dec 20. 2023

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83일


 凡物之榮悴(범물지영췌모든 식물의 자람과 시듦은

 皆因地瘠肥(개인지척땅이 메마르냐 기름지냐에 달렸지

 土肉厚封植(토육후봉식토질이 좋은 곳에 심고 나서도

 猶恐有時腓(유공유시병들지나 않을까 걱정하게 마련

 嗟爾異於是(차이이어시너는 이런 이치와 달라

 性與膏泥違(성여고니타고나길 기름진 땅과는 맞지 않구나

 區區硬盆底(구구경분저조그만 화분의 밑바닥부터 

 鑿鑿碎石圍(착착쇄석돌흙을 차곡차곡 채워 넣으니

 是汝託根處(시여탁근처여기가 너의 뿌리 내릴 곳

 地脉安所歸(지맥안소땅의 기운이 어디로 올라올까 싶은데

 綠葉滋暢茂(녹엽자창무푸른 잎 자라나 무성해지니

 尋尺猶可希(심척유가그래도 한 자쯤은 자라겠구나

 最愛淸曉露(최애청효로새벽녘 맑은 이슬 가장 귀여워

 團團綴珠璣(단단철주송골송골 구슬처럼 맺혀 있구나

 蕭然几案上(숙연궤안상쓸쓸한 책상 위에서

 永與我相依(영여아상오래오래 나와 서로 의지하자꾸나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석창포 작은 화분을 노래함[수분석창포(小盆石菖蒲)]>      


  춘하추동 사계절이 순환하듯 저희 교육원도 봄 1기, 여름 2기, 가을 3기, 겨울 4기를 한 주기로 해서 한 해를 갈무리합니다, 학교생활이 어려워 이곳에 위탁 온 학생들은 돌봄과 사랑, 회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희 교사들 또한 아이들과 사계절을 함께 보내며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이면 4기 일정이 끝납니다. 지난 9월 3기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고 개인적으로 장염에 걸렸으며 동료 교직원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무렵 원적 교로의 복귀 여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동료 교사 세 분은 원적 교 복귀를 먼저 결정하였고 저는 열흘 정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렵게 복귀를 결정하였습니다.


 물론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내는 잔류를 지지했으나 아이를 돌보는 아내의 힘겨움, 아빠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자식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슴 한켠에 ‘내년에도 똑같은 힘겨움을 겪어야 하나’라는 두려움 또한 교육원 잔류를 망설이게 했습니다. 이러한 망설임과 미련에도 불구하고 복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져보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규보의 <책상 위 세 친구를 노래함[안중삼영(案中三詠)」> 첫 수인 <석창포 작은 화분>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이들은 ‘식물이 우리 사람과 같고 닮은 점이 많이 보인다’, ‘전에 키우던 식물이 죽어 새 식물을 들였는데 마음에 많이 와닿는다’, ‘식물을 키우면서 외형적 성장만 기대했는데 이제는 식물의 세부적 특징을 더 알아봐야겠다’ 등의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규보는 책상 위의 세 친구(화분, 연적, 벼룻갑) 중 생명을 지닌 석창포 작은 화분을 먼저 떠올리며 읊고 있습니다. 살면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여러 가지지만 내 책상 가까이에 있는 생명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수시로 우리가 매만지는 스마트폰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글에서 김시습이 산사에서 사슴과 교감하는 장면을 언급하였습니다. 생명이 있는 대상[유정물(有情物)이건 그렇지 않은 사물[무정물(無情物)이건 우리가 타자를 얼마나 눈여겨보고 사랑을 쏟느냐에 따라서 이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 또한 달라지리라 생각됩니다. 이는 곧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배려, 우주의 질서와 조화에 대한 경이, 사랑의 마음을 늘 일상 속에서 품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흙, 돌, 새벽, 이슬, 화분, 책상, 바람, 공기, 햇볕, 사계절 등의 무정물과 식물, 동물, 잎, 균류, 땅속 생물과 미생물, 우리 몸의 세포 등의 유정물과의 조화와 유대, 친절이라는 동류의식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교감하며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 공동체는 조금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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