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菊花欹石底(국화기석저) 바위에 기대어 핀 국화
枝折倒溪黃(지절도계황) 드리운 가지 시내에 노랗게 비치네
臨溪掬水飮(임계국수음) 한 웅큼 물 떠서 마시니
手香口亦香(수향구역향) 손에도 국화 향 입에도 국화 향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남산의 국화[南山菊(남산국)]>
아내가 아이와 반려견 돌봄, 직장 일, 집안일 등 삼사중고(三四重苦)로 지난 1년 제가 파견 생활을 하는 동안 몸 고생, 마음 걱정을 하며 많이 힘들어하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파견 복귀와 함께 위탁 학생이 없는 방학 기간에는 출퇴근을 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하니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안심하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소개할 시의 주인공인 이덕무는 조선후기 서얼 출신의 실학자로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가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합니다. ‘청장’이란 호는 해오라기 같은 맑고 깨끗한 그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
오늘 함께 살펴볼 시는 ‘남산의 국화’입니다. 여기서 남산은 잘 아시다시피 서울의 남산입니다. 가을날 책을 읽다가 머리도 식힐 겸 집 근처 남산에 올랐습니다. 무심코 바위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찰나 그 속에 기대어 핀 국화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냇물을 한 움큼 쥐고 목을 축이려는 찰나 기막힌 시상(詩想)이 떠오릅니다. 바로 ‘손에는 국화 향’ 그 물을 마신 ‘내 입도 국화 향’이라는 시구입니다. 귀로는 시원스레 흐르는 시냇물의 청량한 소리가, 눈으로는 노오란 국화의 선명함이 그의 눈과 귀를 맑게 합니다. 손, 입, 코를 통한 촉감과 미감, 후각까지 오감을 총동원하여 가을날 맑은 햇살, 선선한 공기, 가을 국화, 가을 시냇물 그리고 산책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 혹은 광고 영상처럼 다가옵니다. 그야말로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성격처럼 단아하고 청량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 책상머리에만 앉아서는 나올 수 없는 시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조물주가 이덕무에게 위 시를 짓게 하려고 책만 보지 말고 남산으로 가보라고 유혹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