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일
來從何處來(내종하처래) 어디서 와서
落向何處落(낙향하처락) 어디로 가는가
姸姸細如眉(연연세여미) 어여뻐라 눈썹같이 고운 달
遍照天地廓(편조천지곽) 삼라만상을 두루두루 비추네
- 정온(鄭蘊, 1569~1641), <초승달을 바라보며[신월(新月)]>
며칠 전 머리를 감는데 샤워기 줄에서 물이 점점 새었습니다. 샤워기 머리 부분에 물을 잠궜다 풀었다 하는 버튼이 있는데 실수로 물이 나오는 상태에서 샤워기 머리 부분을 잠근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샤워기 줄을 교체하며 야무지게 고정하느라 스패너로 여러 번 힘주어 꽉 조이다가 그만 고리 부분이 ‘딱’ 소리를 내며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아내에게 핀잔을 들은 후 다시 샤워기 줄을 사서 이번에는 아주 조심히 손으로만 고정하니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교체를 하였습니다.
힘을 줄 때와 빼야 할 때를 잘 알지 못하면 몸과 마음이 수고롭게 되는 걸 꼭 이렇게 경험해봐야 알게 되나 봅니다. 때론 욕심이 과하여 일을 멈추지 못하고 그 일에 파묻혀 계속 전진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탈이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동계(桐溪) 정온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어려서는 부친에게서 글공부를 익혔습니다. 퇴계 이황과 학문적 쌍벽을 이루며 ‘칼을 찬 유학자’로 불리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맥을 이었고 ‘5세 신동’으로 불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삼난(三亂)을 겪고 영창대군(선조의 13째 왕자)의 부당한 죽음을 호소하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에서 10년간 귀향살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청나라와의 화친(和親)에 분개하여 자결을 시도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 실천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저는 저녁을 먹으면 집 주변 산책을 합니다. 반려견과 함께할 때도 있고 혼자서 다니기도 합니다. 길을 걷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손톱 모양의 희미한 초승달이 가끔 눈에 들어옵니다. 사위가 조용한 밤하늘에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신월[新月,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새색시, 아가씨, 수줍은 많은 소년과 소녀, 신학기가 떠오릅니다.
꽉 찬 보름달만큼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 누리를 비추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위 시구처럼 인생길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요? 우리는 어떤 목적과 사명을 지니고 이 지구별에 왔는지요?
일상의 바쁨에 파묻혀 새해 첫날의 바람, 초심,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지 초승달을 바라보며 엄숙히 자문해 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