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34일

by 은은


百轉靑山裏(백전청산리) 푸른 산속 굽이굽이 백 번을 돌아

閑行過洛東(한행과낙동)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가누나

草深猶有路(초심유유로) 풀이 깊어도 길은 있나니

松靜自無風(송정자무풍) 소나무 고요해 바람도 없다

秋水鴨頭綠(추수압두록) 가을 물은 청둥오리 머리처럼 푸르고

曉霞猩血紅(효하성혈홍) 새벽 노을은 원숭이 피처럼 붉다

誰知倦遊客(수지권유객) 누가 알리 자연 속 쉬어가는 이 나그네가

四海一詩翁(사해일시옹) 천하의 시인인 줄을

-이규보(李奎報, 1168-1241), <행과낙동강(行過洛東江)>


향나무 세 그루가 머리에 힘을 잔뜩 준 듯, 그 위에 느티나무 형이 이들을 내려다보며 그늘이 되어 주고 있고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올리니 동네 뒷산이 보이는 아침입니다. 바람이 불고 날이 잔뜩 흐린 것이 곧 있으면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숙소 뒤 뜰에는 여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매미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니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파장과 느낌, 감각으로 자기네들끼리 의사소통하겠지만 우리 인간이 보기에 말 없는 가르침을 펼치며 오늘도 푸른 잎을 띄우고 있는 나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깊은 향과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공자는 “시에서 도덕적 마음을 흥기시킨다[興於詩(흥어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산과 강은 시심(詩心: 시에 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을 길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규보는 영남의 어느 산길을 지나면서 낙동강을 굽어보며 시심을 길어올리고 있습니다. ‘푸른 산속’, ‘강’, ‘풀’, ‘소나무’, ‘바람’, ‘가을 물’, ‘청둥오리’, ‘새벽 노을’이란 시어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선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연지기(浩然之氣: 너르고 크며 올바른 기운)와 시심을 기르고자 산수 유람을 하였습니다. 산과 강은 그 자체로 경이의 대상이었으며 ‘또 다른 나’이자 만물을 길러주고 보듬어주는 부모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크건 작건 간에 내면에 시심과 생태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풍경을 마음 속에 갈무리하고 삶이 허전하거나 혼돈스러운 느낌이 들 때 가벼이 우리 산하 순례를 떠나보면 어떨까요?


벌써 40년 전의 일입니다. 부산일보가 <낙동강, 늦기 전에>라는 특별 기획 기사를 81년 9월부터 82년 4월까지 55회 연재하면서 <오염으로 시드는 7백리, 그 실태와 처방>을 통해 낙동강 오염의 실태를 밝혔습니다. 아래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억겁의 세월을 두고 이 땅에 풍요로움을 안겨 준 낙동강. 조상의 얼이 담겨 흐르는 이 강이야말로 영원한 민족문화의 요람이다. 이 강가에는 이제 고도산업 사회의 기적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의 강이 지금 날로 가속되는 수질 오염으로 서서히 죽음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낙동강이 황폐하고 죽음으로 이르렀을 때 주변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보라. 거기엔 인공 사막이 있을 따름이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너무 늦기 전에 치유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박태순, 《국토와 민중》, 1983, 324쪽에서 재인용)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낙동강과 주변에 몸담고 있는 수생식물, 조류, 사람을 포함한 대자연의 생명은 하루도 물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낙동강 개발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60~70년대 박정희 정부 때의 근대화와 공업화, 지난 이명박 정부 때의 4대강 공사로 인해 우리의 젖줄이자 생명수인 낙동강의 수생식물과 조류, 주변 마을, 농경지, 사람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원래 있던 곳을 떠나거나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민들과 주변 생명들은 어미 잃은 아이가 되어 농경지와 서식지를 빼앗기고 낙동강 주변의 문화와 정신적 유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생태적 지혜와 감수성마저도 잃어버리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물과 강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삶의 지혜와 터전을 우리 스스로 파헤치고 오염시키고 물의 흐름을 강제로 조절하려는 오만함을 부린다면 그 폐해는 우리 세대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고 시심(詩心, 시를 짓고자하는 마음)을 내고 무엇에 감동하고 감탄할 수 있을까요? 회색빛 아파트에 둘러싸여 낙동강 보와 녹조, 죽어가는 물고기와 새들을 바라보며 생명의 근원과 신비, 생태적 감수성을 어떻게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강과 이 땅의 생명들과 후손들에게 미안하고 두려워지는 요즘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