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이 있는 삶

성균관대학교 총동창회 3월 회보의 동문 수필 기고문

by 노완동

"재범아, 내일 아르바이트 좀 할래?" 학사주점에서 한참 술을 마시는데 주인장이 느닷없는 제안을 한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외상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의례 있는 일이었다. 당시 하루 일하면 일당이 2만원 정도였는데 외상이 정확히 2만원, 4만원이 아니라도 3만원이면 이틀 일한 뒤 끝나고 한잔 더 먹거나, 5만원이면 그냥 퉁치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90년대 초반 대학생들은 의례 학교 앞 가게 한두 곳에 외상이 있었다. 물론 모범생이나 경제적으로 풍족한 친구들은 예외지만 정해진 날에 부모님께 용돈을 타는 이들은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집세 다음으로 외상값을 갚곤 했다. 그 후 열흘 정도는 두둑한 주머니로 호기롭게 학교 앞 주점들을 드나들다가 조금씩 아끼고 아끼다보면 어느새 외상을 하고 다음 용돈 타는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행여 아르바이트로 가윗돈이 생겨도 그걸로 끝이지, 외상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요즘 정부나 정치권에서 청년들을 위한 복지나 지원책들을 많이 발표한다. 당장은 달콤하겠지만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외상임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모두가 어떤 외상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만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누릴 수 있는 혜택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진짜 궁금한 건 언제, 얼마나, 누가 갚아야 하고 어떤 방법이 있는지 여부이다.


때가 되면 용돈을 주시던 부모님처럼 책임을 지던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스스로 갚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일자리도 없고,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냥 세금을 늘여 때우려는 처사에 그 누가 화가 나지 않겠는가.


외상이 가능했던 시절이 더 좋았다는 식의 추억팔이는 식상하다. 정보가 넘치고 불확실성이 증가할수록 외상이란 단어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다만 외상이 있어도 저녁에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서 내일 다시 뛰면 된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저녁에는 현금 말고 신용카드 들고 가서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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