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기에 여러분은 빛난다
완벽은 창의적 사고를 제한한다
완벽을 내려놓으면 자유의 흐름이 온다
예술 작품도 실수나 우연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은 것처럼
이글이 잠시 당신이 숨을 돌릴 수 있는 마음의 쉼표가 되기를 바라며
'완벽'이라는 단어가 내 삶을 어떻게 가두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 어떤 기회들이 열렸고 열리고 있는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완벽.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완벽성을 가진 인물은 세상에 없다. 자연조차도 불완전함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낸다.
완벽을 향한 집착은 대게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실패가 두렵고, 남보다 뒤처질까 두렵고, 사랑받지 못할까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이라는 갑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 갑옷은 점점 더 무겁고, 단단해져서 결국 자기 자신을 숨 막히게 만든다.
완벽주의는 보통 유년 시절부터 스며든다.
"좀 더 잘할 수 있었잖아"
"왜 이것밖에 못 해?"
부모의 영향도 가미된다. '당연한 걸 한 거야', '다음엔 뭐 할 거야?'
칭찬과 격려와 인정의 결여는 역설적이게도 완벽성을 추구하게 만든다.
(물론, 아들이 더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심정도 십분 이해는 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믿음을 계속 끌고 간다.
결과로만 평가받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 가치는 늘 시험대 위에 놓인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1-6학년 반장/회장을 연임하면서 솔선수범의 삶을 살아왔다. 중학교 때는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애썼으며,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장남으로써의 체면과 위신을 깎는 행위임을 그 어릴 적 시절부터 마음속에 심고 살아왔다.
실수를 두려워했고, 모든 것을 체계화시키며 완벽성을 추구하려 했다. 오죽하면 초중고 생활기록부 내내 책임감과 완벽하게 해내려는 것을 선생님들이 이야기해 주셨을까. 부모님은 그게 정답이라는 걸 익숙해질 때까지 가르쳐 주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결벽에 가까운 완벽을 추구했던 날이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을 하게 되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SG워너비의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연습했다. 완벽한 화음으로 친구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A-Z까지 구성과 화음을 기획하고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상상을 수없이도 했다. 초 단위로 호흡을 컨트롤하자며 제안했고 무대에 올라가는 시간까지 컨트롤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 오르기 직전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찾아왔다. 완벽함에 집착하다 보니 유연성을 상실한 채 온몸이 긴장으로 덮였다.
무대는 어땠을까? 화음이 엇나갔다. 그것도 친구들이 아닌 내가
즐기기보다 완벽하게 해내야겠다는 책임의식이 나를 가뒀고 친구들에게까지 피해를 주었다. 무대를 내려온 이후에도 자책을 했고, 친구들은 괜찮다 했지만 그날 하루는 온종일 실수 생각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느낀 불안과 피로,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와서는 더욱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어떻게든 장학금을 타기 위해 밤을 새우던, 만취해서 잠들어있던 수업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출결이던, 교수님의 말 한 토시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던, 족보를 얻기 위해 선배들에게 숱하게 연락을 돌리며 시험을 준비했던 거며 도서관 문은 꼭 내가 닫으려고 애썼다.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풋살을 하며 머리를 비우며 여유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의자에 엉덩이를 떼면 불안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장학금을 위해 달렸는데 한 학기를 제외하고 장학금을 받았다. 그 당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래와 같다.
'1등은 못했네 결국? 전액은 못 받았네?'
'이 쥐꼬리만 한 장학금으로 무얼 할까? 내 앞에 두 명은 어떤 친구들일까?'
충분히 칭찬해 줄 수 있었지만 어떻게든 부모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달렸다.
내 존재 이유 자체가 부모님께 맞춰져 있었다. 껍데기만 풍성한 채 내면은 비어 가고 있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랐던 나. 그러나 타인의 인정은 신기루였다.
신기루와 동시에 나는 깊은 늪에 빠졌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유년 시절부터 형성된 나의 마음을 덜어내는 일이 꽤 쉽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일단 대전제가 있다. 이 세상조차 완벽하지 않다.
희비가 극명하며 지금 한국 사회는 양분화되어 있다. 나라조차 완벽하지 않다.
완벽함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불완전하다.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고, 충분히 넘어질 수 있다. 불완전하기에 배움이 있다. 배움이라는 키워드가 그 자체로 온전히 빛나려면 불완전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부족하다. 부족하다는 말이 부정적이 뜻이 아니다. 부족하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부족하기에 앞으로 해나갈 것들로 인한 성취를 맛볼 수 있다.
부족한 나 자신이 감사해지는 순간이다. 너무 극단적으로 부족한 건 안 좋은 거야라며 치부하지 말자.
연약하기에 일어설 수 있다. 넘어졌기에 무릎이 까질 수 있는 것이고, 무릎이 까질 수 있기에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거다.
내 인생은 완벽하게 끝날 수 없다. 모두가 불완전함으로 잠든다.
금수저, 좋은 학벌, 아무리 젊음의 시작이 좋았어도 노년의 나이엔 건강이 최고라고 이야기하듯이.
그래서 내려놓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대충 살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열심과 완벽 사이의 간극을 조절하며 그 사이에 자신을 격려, 인정, 칭찬해 주며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
그것이 조금은 내려놓음이라 말할 수 있겠다.
완벽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일에 같은 수준의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중요한 PT와 이메일 보고에 들이는 노력이 같을 수는 없듯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기준을 상황에 맞게 설정하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매일 아침, 오늘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각각에 들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현실적으로 배분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린 TASK를 받았을 때 보통 120% 완벽하게 더 잘하려고 한다. 그러나, 120%을 쏟아도 되려 120% 이상 지치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 그 이후의 지친 마음을 달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때도 있다.
오히려 80%의 완성도로 끝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120% 쓰고 쉽게 방전되어 버리기 VS 80%만 쓰고 꾸준히 오래가기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다. 결국 인생은 꾸준함 싸움이다. 건강한 꾸준함이 건강을 만든다.
어차피 100% 쏟아도 피드백은 온다. 무사히 넘어가면 본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80을 쏟고 20은 어떤 말이던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여백을 챙겨보며 어떨까?
하루에 한 가지, 내가 ‘구멍 났다’고 느꼈던 일을 기록한다. 단, 그 아래에 반드시 적는다.
이것 덕분에 무엇을 배웠는가?
나의 경우 코칭을 한 이후 소위 말아먹었다고 표현할 때가 있다. 고객과 함께 춤추지 못했고, 바꾸려 했고 관철하려 했던 나 자신을 마주할 때다. 그때 나의 집중과 시간엔 구멍이 났던 적이 많다.
그러나, 이것 덕분에 무엇을 배웠는가?
고객을 그대로 보고 마주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정말 신기하게도 고객향으로만 가지 않는다. 그 방향은 내게도 돌아온다. 더 나은 코치가 먼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연습은 실패를 ‘기록’이 아닌 ‘도구’로 바꾸는 작업이다. 불완전함을 통해 나를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숨 막히는 가뭄 같은 땅 가운데 물구멍 하나 내어주는 것이다.
구멍이 어쩌면 가뭄을 이겨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방법도 있다.
SNS에 일부러 잘 찍지 않은 사진을 올려본다거나, 흔들리는 사진을 올려보는 것이다. 구린초고를 그냥 올려보는 것이다.
요즘 스레드에서는 이런 문화가 확산 중이다.
그냥 꾸준히 뭐라도 올려봐요, 쪽팔리건, 혼자 외치건 올려봐요
아무도 안 볼 거라 생각했는데 과거 글을 보고 연락이 오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구린 초고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
완벽보다는 완주하는 인생이 되어보자
처음에는 불안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코치님의 말처럼, 세상이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완벽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창의성은 실수와 우연 속에서 피어난다. 완벽을 추구할 땐 실수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수 속에서 놀라운 발견이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은 번짐, 계산되지 않은 흐름, 계획되지 않은 멈춤. 예술은 그 틈에서 태어난다.
봉준호 감독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개인적인 것에는 완전함이 없다. 완벽하지 않기에 창의적인 사람인 것이다. 정형화되어 있고 완벽하다면 그건 기계다.
우리는 부족하기에 오히려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이다.
완벽하면 창의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 틀에 맞추기 때문. 허점과 공간을 내어줄 때 창의성이 꽃핀다.
완벽을 내려놓으면 하고 싶은 것들이 더 피어난다.
요즘 너무 좋아하는 말이다.
'추잡하게 시작해서 정갈하게 마무리해 보는 삶'
약점을 드러낼 때, 관계는 비로소 살아난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보다는,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더 끌린다. 솔직한 고백, 실수한 이야기, 후회했던 감정. 그런 것들이 사람을 연결한다.
우리는 성장스토리에 끌린다. 태초부터 완벽한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다.
그래서, 임영웅도 많은 어머님들의 사랑을 받는다.
허점 많은 사람들, 자신의 실수로 감추려는 사람들, 나이스하게만 보이려는 사람들 매력 없다.
완벽함을 내려놓고 진실성 있게 다가오는 이들이야 말로 삶의 전선에서 진심으로 용기 있는 자들이다.
교회 리더를 하면서도 여실히 느낀다.
리더십도 필요하지만 지혜롭게 나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 진심을 고백할 때 그들의 눈빛이 살아나고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진심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불완전한 나를 드러내는 곳에 완전한 공동체가 생긴다.
완벽은 미래에만 존재한다. 완벽하게 해낼 것만 상상하다 보면 미래지향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늘 지금 여기에서 흐른다. 완벽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지금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순간, 시간은 비로소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빠름과 변혁의 시대에서 전념하며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하는 이들. 나는 그런 분들이 존경스럽다.
완벽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사라져야 할 환상이다. 우리를 오히려 옥죄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때로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그 여정 속에 진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니 우리 인간미 있게 살아가보자.
우린 인간이지 않은가. 인간답게 살아가자.
AI에게 대체되지 않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 숭고한 매개체는 '인간미'다.
아름다움이다. 나다움이자 여러분 다움이다.
지금의 나도, 지금의 당신도 그렇게 충분하다.
당신의 인생은 충분히 찬란하고 괜찮다.
미팅을 준비하면서 이 글을 읽는가, 지친 삶 속 가운데 이 글을 읽는가
프로젝트가 산더미인데도 불구하고 집중이 되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이 글을 읽는가
걱정하지 말기를
이 세상 가운데 당신은 유일한 존재이고
그런 유일한 당신의 빈틈은 당신을 당신답게 해주는 제2의 찬란한 공간이다.
끝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최선의 결과를 내어야 하는 여러분만의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앞으로 달려가는가?
여러분만의 충분히 좋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 하루 당신의 나사 하나를 빼어 조금은 신나 볼 수 있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홉 번째 보물 요약
1. 완벽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완벽을 추구하지 말자
2. 완벽보다는 완주를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보기를
3. 완벽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살아보자
4. 당신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빛나는 사람이다. 웃자 : )
나우디의 완벽함을 내려놓자 다른 이들과 함께 뛰놀 수 있었다
타지에서 온 나우디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대해줘서 고마워~'
완벽을 내려놓자 세상 속에서도 섞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우디는 스스로를 굉장히 뿌듯해했다.
발그레 웃는 나우디와 사람들
그 마을엔 진정성의 온기가 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