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은 모든 걸 이긴다
어느덧 마지막 보물에 다다랐다.
꾸준함.
가장 어렵고도 가장 강력한 보물이라 마지막을 장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로 시작해 본다.
나는 소위 말하는 주먹구구식 인간이었다. 머리가 비상하지 않아서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하곤 했다.
짐을 옮기는 것도 시키는 대로만 했고 효율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물건을 옮기다가 주정차구역인지도 모르고 벌금 딱지가 날아온 적도 여럿 있다. 헛돈이 꽤나 나갔고 앞만 보는 무식이었다.
대학교 땐 의자에 앉아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술 마시고 놀면서 3일 만에 공부한 친구가 1주일을 매달린 나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 걸 보고 꽤나 배가 아팠다. 절대적인 양을 더 투입했는데 이해의 폭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보고 현타가 왔던 기억이 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풋 대비 아웃풋은 정확히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머리 차이였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나의 엉덩이는 의자에 더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때 꾸준함의 힘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나의 베스트프렌드였던 의자와 함께 차석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비단, 이건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 아버지는 군시절 보일러병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한눈판 사이에 보일러실 사이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보일러실 전체가 탔다. 아버지는 그 이후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셨다.
거대한 보일러실 도면을 몇 날며칠 동안 쉬지 않고 직접 손으로 그렸고, 보일러병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한 표시도 추가했다.
그 주변 지역의 구조까지 전부 직접 눈으로 보고 다니며 표시했다. 대충 그리지 않고 정확한 길이와 모든 규격을 표시할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던 대대장은 아버지의 도면을 통해 진행했고 무사히 보일러실도 재가동되었다. 아버지는 눈에 띄어 결국 사단장을 보좌하는 운전병으로 늠름한 군시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안에 아버지의 꾸준함이 흐르는 것만도 같다. 더하여 대학시절의 삶이 자그마한 습관이 되었을까? 머리는 부족해도 내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면 끝까지 해보려는 집념은 생긴 듯하다.
아집인지 객기인지는 모르겠다만 빛이 생겼다.
그 시작이 전공을 떠나 나의 길을 걷는 선택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보이지 않는 길인 것만 같지만 무어라도 해나가며 꾸준히 하다 보면 어디든 발 닿을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가지의 직업을 거쳐 코치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분명 모든 걸 하는 인재는 아니다. 다만, 모든 걸 되게 하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누구나 쉽게 시작한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잘하는 사람보다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다.
위에서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꾸준함의 영역은 여전히 나에게 부족한 숙제다.
때론 가시 돋친 말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내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꾸준함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그 어떤 9가지의 보물보다도 1가지의 꾸준함이 9가지의 보물을 창출해 내기 때문이다. 30년 이상의 내 삶에 자리 잡은 꾸준함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연약하고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내 삶에 있어선 가장 중요한 것이자 꾸준히 했던 유일한 것이기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문득 어느 날 15년 지기 친구가 내게 말을 건넸다.
야 너는 그래도 꾸준한 게 장점이여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다시 물었다.
에? 내가? 뭐가 꾸준한데?
그러자 친구는 답했다.
너 30년 넘게 꾸준히 교회 다니고 있잖아
당황한 이유는 생각해 보면 내 삶에 ‘꾸준히 해온 것’이 딱히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도, 글쓰기나 공부도 꾸준히 해왔다고 말하기엔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매주 일요일, 나는 교회에 갔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요일은 교회 가는 날이었다. 신앙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초점은 꾸준함이다.
나는 엄마 뱃속부터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년시절엔 강제적으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이 싫었다.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달란트 잔치가 있다는데 뭐 그런 구질구질한 거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19살 까지는 반 강제적으로 교회에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짜증 났다.
20살엔 더욱 고삐가 풀렸다. 대학 생활과 동시에 음주가무를 즐기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탈선은 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그렇게 술에 떡이 되어 냉장고 앞에 자고 있는 아들을 그대로 두셨다.
내 가방엔 항상 생쌀과 생김이 있었다. 술 마신 사실을 걸리지 않기 위해 입냄새 제거에 좋다기에 항상 챙겨 다녔다.
그렇게 냄새를 없애기도, 구박받기도, 포기당하기도 했던 나였다.
그런데 진짜 웃긴 사실이 뭔지 아는가?
그래도 매주 교회는 갔다.
술냄새 풍긴 채 예배당에 앉아있었고, 엄마 아빠에게 혼나기 싫어서 억지로라도 교회에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의무감보다도 그저 내 안의 의식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이것도 꾸준함이구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참 진짜 어릴 땐 몰랐는데 종교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매주 가잖아. 나는 매주 하는 건 없어~
앞서 말했듯 어린 시절의 나는 믿음이 뭔지도 모르고 교회에 다녔다. 주일학교, 찬양, 성경 암송. 그냥 ‘원래 그런 거니까’ 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휘둘리고, 마음이 무너지고, 삶의 이유를 잃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기하게도 그 공간에 가면 내 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고, 말없이도 내 곁에 있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매주 다시 돌아가고, 또 돌아갔다. 어느 날은 도착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3시간 동안 눈물만 흘리다 온 적도 있다.
이제는 안다. 그 반복되는 시간의 녹이 내 마음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어쩌면 신앙은 내게 ‘살아 있는 꾸준함’이었다.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계속하게 되고, 성과를 바라지 않아도 멈출 수 없는 그런 루틴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꾸준함,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했다.
핵심을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만이 수십 년째 지켜오고 있는 꾸준함의 영역이 있는가?'
비단, 종교가 아니어도 괜찮다.
사람들은 꾸준함을 ‘의지력’이나 ‘성실함’ 같은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본다.
꾸준함은 삶의 중심을 향해 ‘돌아오는 선택’이다.
넘어져도, 잊어도, 무너져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꾸준한 사람이다.
꾸준함이란 대단한 열정이 아니라, 돌아올 곳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삶이 무너질 때 나를 지켜주는 가장 깊은 뿌리가 된다.
그것은 신념이 될 수도 있다. 나를 지켜주는 한 마디일 수 있다.
꼭 움켜잡고 싶은 가치일 수 있다.
여러분만의 꾸준함은 무엇인가?
무얼 위해 꾸준해지려 하는가?
누구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꿈꾼다.
SNS에서는 팔로워 수,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수입, 명예와 성공 그리고 인정.
하지만 내가 신앙을 통해 얻은 꾸준함은 그런 외적인 지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안겨주었다. 바로 마음의 평안, 방향감각, 그리고 내면의 회복력이다.
30년 이상 꾸준함을 유지하니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었다. 7년의 장기연애 이별을 통해 커다랗던 상심은 꾸준함 앞에 무기력해졌다. 요동치지 않았고, 내면을 다시금 빠르게 붙잡을 수 있었다.
나아가 다시금 대학시절의 불을 가슴 안에 심겨주었고, 대인 관계에 있어 조금 더 솔직해지게 되었다. 남들 눈치를 덜 보기 시작했고, 나만이 가진 기준점이 생겼다.
가진 것이 없지만 부요한자가 되었다.
내면의 자라난 단단함은 두 다리로 우뚝 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상실을 겪은 자가 아닌 사랑의 상속을 받은 자였다.
세상 속에서 진짜 살아남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내면이 단단하고 그 단단함을 꾸준히 지킬 수 있는 자다.
그런 사람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바꾸며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조용히 커피를 내리며 자기 암시를 통해 하루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일주일에 한 번 꼭 산책을 하며 스스로의 걸음을 마주하며 마음을 정리할 수도 있다.
때로는 하루에 한 번씩 작은 도전과 성취를 반복해 가며 꾸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도 있다.
그 루틴은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작은 성소’가 된다.
분명 말할 수 있다.
여러분만의 고유하고 숭고한 꾸준함이 반드시 한 가지 이상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했다면 칭찬해 주자.
그간 그 마음을 잘 지켜왔다고 칭찬해 주자.
당신만의 꾸준함을 발견했다면 어마무시한 무기를 얻은 것이니 격려해 주자.
무기를 지니고 나아가려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다.
꾸준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꾸준함은 완벽하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자리를 알고 계속해보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써본다. 어쩌면 몇 번 빠질지도 모르고, 다시 다짐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코치로써 따뜻함을 전하며 살아갈 사람이다”
"작은 나도 사용하시는, 이런 나도 살아갈 수 있다"라고.
어쩌면 꾸준함이 가르쳐준 가장 큰 선물들 중 하나는 담대함일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계속하게 되는 것.
쉬어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루틴, 혹은 장소, 혹은 사람 그게 바로, 당신의 꾸준함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지금 당신의 삶 속에 작지만 확실한 ‘돌아올 자리’를 하나 만들어보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만의 마지막 보물이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길을 잃을 때 반드시 돌아왔던 공간은 어디인가요?
그 공간이 당신에게 어떠한 힘과 에너지를 가져다주었나요?
그 에너지가 지금은 현재 어디에 있나요?
그것을 다시 더 잘 다뤄나간다면 당신의 존재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요?
돌아올 자리를 청소하기 위해 당신은 어떠한 도구를 활용하실 건가요?
꾸준함은 모든 걸 이긴다.
불합리한 세상 속에 자신만의 언어를 선포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뀐다.
본질을 추구하며 꾸준히 나아가는 이들에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선물이 찾아온다.
나에게도 그런 선물이 찾아왔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꺼내 놓는 보물
바로, 꾸준함이다.
열 번째 보물 요약
1. 끝까지 가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2. 쓰러져도 일어나 돌아오는 꾸준함을 지닌 사람이 되자
3. 꾸준함은 확실히 내가 돌아올 자리를 아는 무언가이다
4. 꾸준함이 모든 세상을 이긴다
나우디는 꾸준히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을 나눴다.
꾸준함으로 마주한 나우디의 내면엔 사랑이 피어났다.
나우디는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다.
10가지 보물을 손에 쥔 나우디는
따뜻하고 섬세하게 스스로를 마주하며 사랑을 전했다.
그 덕에 온 마을에 사랑의 씨앗이 심겼다.
나우디는 이제 어떠한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나우디의 집 푯말엔 금색 빛깔과 함께 이렇게 새겨졌다.
나우디.
헤맨 만큼 발견한 10가지 보물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