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_01

by 나우히어



칠흑 같은 어둠.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 멀리 아주 희미한 하나의 불빛과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의 옅은 빛에 의존해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딛고 있다. 내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저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라도 알면 조금은 덜 힘들까.


겨울은 아닌 것 같은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입고 있는 옷도 제법 두툼한데 내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기가 무서울 정도다.


순간 발끝이 따끔거려 내려다보니 왼쪽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고 오른쪽은 수면양말을 신은 채다. 오른쪽 발로 바닥의 뾰족한 무언가를 밟았나 보다. 그런데 내려다본 내 왼쪽 발이 내 발 같지가 않다. 시퍼렇고 퉁퉁 부은 것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코끼리 발 같다.


이렇게 계속 갈 자신이 없어 남희에게 전화를 하려고 주머니를 더듬어 보는데 휴대폰이 없다. 휴대폰이 없다는 것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온몸이 떨리고 동물의 발 같은 내 발을 보는 것보다 더 두렵다. 나와 남희를 연결해 주는 하나 남은 끈이 끊어져버린 것 같다.


남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끈으로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주었는데 이제는 아닌가 보다. 우리를 나를 지탱해 주었던 그 끈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가 사법고시에 3번 연속으로 떨어졌을 때였을까, 아니면 강남의 방 3칸짜리 아파트에서 경기도 외곽의 방 2칸짜리 빌라로 이사 갔을 때였을까, 아니면 팔자에도 없는 사업을 하겠다고 외국을 왔다 갔다 하며 헛돈을 썼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술에 취한 어느 날 아니 많은 날들마다였을까.


내 기억 속에서 그 끈들이 하나씩 뚝뚝 끊어질 때마다 내 팔다리가 한쪽씩 꺾이는 것 같다. 그러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마지막 끈이 점선으로 바뀌더니 그 점들도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 아까 내 오른발이 밟았던 뾰족한 무언가가 내 눈 바로 옆에 와 있다. 그러자 걷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하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이다. 한 손을 위로 들어 흔들고 있다. 아니 흔들고 있다기보다는 나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인 것 같다. 아직 누구인지 모르겠다. 너무 멀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눈꺼풀에 한번 더 힘을 줘본다. 힘을 주면 줄수록 눈앞이 더 흐려진다.


눈앞은 흐려지는데 이상하게 아까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소리, 큰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들려오는 여인의 아니 여인들의 목소리.


아빠인지 오빠인지 여보인지 아니면 막내야인지 한꺼번에 들려와서 구분이 안 된다. 그때 별안간 여인들의 목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


바로 사이렌 소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유일한 감정 무이한 순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