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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l 12. 2023

한 여름의 이혼

사라진 봄과 현실의 여름, 가버린 겨울, 그리고 지금

 올해 내게는 봄이 없었다. 꽃이 어떻게 피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나마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이와 함께 집 앞 벚꽃 구경을 했던 날이다. 어느 토요일, 그와의 숨 막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 아이를 데리고 나간 산책길에 눈앞 가득 채우던 떨어지던 꽃잎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면서도 내게도 웃을 일은 있었다. 까맣게 내려앉은 것 같던 그 시간 속에도 그 순간만큼은 눈부시게 예쁜 벚꽃과 아이의 행복한 모습이 나를 기쁘게 했다는 것이 이제야 위안이 된다.




  반복되는 싸움과 오고 가는 칼날 같은 폭력이 만성화되면 내가 ‘엄청나게 힘들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까지도 시간이 꽤 걸린다. 이에 수반되는 감정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기반을 두고 발생한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언어로 설명이 되질 않는다. 뿌옇게 부유하는 감정들은 생각의 구름을 만들어낸다. 그 구름이 자아낸 눈물의 양과 위력은 어마어마해서, 마치 폭풍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계절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마음의 안개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린다. 희미하고 뿌연 빛 속에서 얼버무려진 회색 덩어리들과 까만 그림자만 주변에 맴도는 느낌. 나름 빛나던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진흙탕이 되었는지 한탄하고 자책하느라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결국 나는 좀비가 되어 시골로 도망치듯 피신했고, 그 자체도 서글퍼 마치 유배를 가는 심정이었다. 인생의 사건들에 대체로 물러선 적 없는 내가 '도망'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그 정도로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나약함을 드디어 마주 보며 그저 사라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피난한 것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예전 집에 있었다면 결코 누리지 못했을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며 엄청난 속도로 많은 책을 읽고, 오롯이 나를 마주 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 결과물을 틈 날 때마다 브런치에 기록했다. 아이와 흙길을 걸으며 다신 돌아오지 않을 빛나는 시간들을 차곡차곡 함께 쌓기도 했다.



흑백의 봄과 선명한 여름


 치열하게 슬퍼했던 흑백의 봄에 갑자기 선명한 색을 들이붓는 듯한 생활이었다. 매일 오가는 산책 길에 새로이 피고 지는 꽃들과 변덕스러운 소나기, 흙냄새, 뜨거운 햇빛에 빨갛게 익어간 아이의 얼굴이 내게 삶은 변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던 논이 어느새 모종들로 가득 찬 녹색 호수가 되었다. 마을 초입의 옥수수들은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을 만큼 자라났고, 내 아이도 훅 자라나 바지가 죄다 짧아졌다.

 고작 몇 달 새 이렇게 많은 것들이 자라나고, 생명력 가득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 사이에서 혼자 유령같이 떠돌던 나조차 서서히 현실에 발을 딛고, 감사한 것들을 되새길 정도로 회복했으니 자연이 이래서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 여름이 찾아왔고, 나는 여전히 이혼하는 중이다. 벌써 올 한 해의 하반기로 접어들었다는 시간의 흐름이 믿기지 않는다. 겨울과 봄 사이에 시작되었던 싸움의 끝을 기다린다. 나는 여전히 문득 슬프고 억울할 때가 있지만, 만약 지금이 내 우물에서 뛰쳐나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마지막 뜀박질이라면 나는 한껏 숨을 고르고 있는 힘껏 점프해 나갈 것이다.

 더 이상 이끼 낀 내 우물이 전부라며 고집하기엔, 이미 나는 연고도 없는 이 시골집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이 어디로 흐를지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발을 헛디뎌 또 다른 우물로 뛰어들지언정 최소한 잠깐이라도 엿본 세상으로 또다시 뛰쳐나갈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겨울이 되어서야 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고,
가장 아름다운 봄의 노래는 겨울에 만들어진다


 나는 청년과 중년과 노년의 기준을 잘 모르겠다. 어릴 때는 뚜렷하게 구분하던 나이대의 이상적인 모습이 있었는데, 막상 살아보며 내가 그 기준에 합당하게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다.


 10대 때는 예쁘게 마음껏 꾸미고 다니는 20대들이 부러웠고, 20대에는 그 아름다움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인생을 탕진하면서도 30대가 되면 꽤나 고상하고 우아한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30대의 끝자락이 되어보니 나는 아직도 어느 부분은 10대와 같고, 20대의 열정과 무모함도 채 떠나보내지 못했으며, 고상과 우아는커녕 하루하루 분노와 안도와 불행과 만족 속에 널뛰며 살고 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내 나이에 사기당하듯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먹은 것 같아 분개하다가도, 남편만 빼고 나머지는 그대로인 생활을 생각해 보면 잃은 것도 그다지 없다. 게다가 그 빈자리를 채우는 다른 충만한 것들은 '감사'말고 다른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그를 잃음으로써 얻은 것들을 그와 다시 바꾸자 한다면?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슬픈 봄을 지나, 헤어지는 여름이 왔다. 곧 짧은 가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다가올 계절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겨울이 되어서야 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고, 가장 아름다운 봄의 노래는 모두 겨울에 만들어졌다는 어느 신부님의 강론을 되새겨본다. 가장 힘든 시절에 깨닫는 소중한 것들은 그 가치가 크고도 크다. 그러나 올 겨울만은 어떤 것도 그리워하지 않고, 그저 올해 내가 잃어버렸던 봄이 내년에 더 만개하기만을 기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가장 춥고 황망한 그 순간에 그리워하는 봄은 멀리 있지 않다. 그 따듯함과 가장 먼 것 같이 느껴지는 겨울은 사실 봄과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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