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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뜰날 Jul 23. 2022

인연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이 녹록지 못하여 종종 고마웠던 인연들을 잊고 지내게 된다. 나도 그랬다.

그러다 다시 우연히 연락이 닿아 만나고, 과거의 인연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되새기게 되는 날이 있다.


어느샌가 서로의 생활에 치여 연락도 뜸해졌던... 일본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같이 일했었던 그녀들을 만났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선택한 20대 후반의 일본.

그곳에서의 생활이 1년이 되기 전에, 후쿠시마 동북부 대지진이 일어났다.


전 세계가 놀란 일이고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공포스러웠던 그 자연재해를 보고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지진 이후, 매우 빠르게 일본에 있던 유학생과 근로자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노심초사로 한국행을 택했다.


그 돌아온 사람들 중엔 우리 넷 포함됐다. 한동안 한국에 돌아와서 갈길을 잃은 듯 각자의 삶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며 마음고생을 했다. 각자의 꿈은 달랐지만 모두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경로가 갑자기 유턴된, 우리 넷이었다.


그때 당시, 가장 젊었던 23살의 귀엽고 어린양이 많던 민정이는 지금 35살로 6개월 아이를 둔 엄마가 되어있었다. 민정이에게 언니들인 우리 셋은 쌀로 밥도 못했던 민정이에게 애가 애를 낳아 어쩌냐며 한참이나 짖꿎게 웃으며 놀려댔는데, 자기도 자기가 걱정이라며 민정이는 되려 함박웃음을 짓는다.


집과 회사 이외에는 따로 일본 곳곳 여행도 안 다니며 성실했던(그녀들의 기억 속에) 나는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매일 육아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나의 룸메이트였던 밝고 웃음이 많았던, 아이를 누구보다 좋아해서 제일 먼저 결혼할 줄 알았던 세라 언니는 아직 미혼으로, 가방 사업을 하는 멋진 CEO가 됐다.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는 게 너무 좋다며 여행을 사랑했던 현정 언니는 돌아온 한국에서 우연찮게 입사한 직장에서 벌써 10년 근속을 했다며, 이 직장에 뼈를 묻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30.40대 여자 넷이 모였다. 10여 년도 더 지난 우리 넷의 일본 생활이었지만, 마치 어제 하네다의 일터에서 본 것처럼 반갑고 즐거웠다. 타국에서 외국인 근로자였던 우리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고, 의지했다. 그 덕분일까.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기에 과거와 현재의 어떤 이야기를 갖다 붙여놔도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읽어주는 그녀들이었다.


1년 남짓의 나를 보고 겪은 이들이 나보다 더 잘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고민 하나를 이야기하면 벌써 그 뒤에 서너 가지를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나의 말과 행동을 유추해 내는 그녀들에게는, 내가 타인에게 하는 합리화나 핑계, 변명이 필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그녀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때의 나를 기억해준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나로서 빛났고, 가장 예뻤고, 제일 즐거웠던 그 시절.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그녀들의 입을 빌려, 내 마음에서 다시 그때의 나를 만난 게 더 좋았던 것 같다. 음에서 잃어버린 나를 되찾은 느낌이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우울과 공황장애, 그리고 여러 가지의 감정 기복을 겪으며 잿빛 먹구름 같은 우울감이 언제나 내 마음에 잔잔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있었다. 그것들을 싫다고 부정하기보다는 그냥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란 사람이 젊을 때 용케 가려졌던 우울감이 육아를 하면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 때도 많았다. 감정 기복과 마음의 불안들을 잘 다루면서 평생을 함께 갖고 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로 인해 나의 마음에서 밝음과 긍정이 소환되었다. 내 마음의 기본값이 우울 같다고 혼자 의사인 양 진단하고 지내는 요즘이었다. 마음이 잿빛 먹구름에서 그녀들과의 대화로 파란 하늘로 변했다. 

마음의 기본값이 다시 재 설정된 느낌이었다.


그때의 우리들의 생활과 추억들을 나누고 현재와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우리 넷은 모두 아줌마들처럼(기혼자는 아줌마가 맞겠다;) 깔깔깔 웃는 얼굴로, 너나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떠들어댔다.


 여자들의 수다는 실로 놀랍다. 그렇게 장장 5시간을 떠들어놓고 누구 하나 목 아프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헤어질 때가 되니, 지금의 의 힘듦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당연스러운 것임을.

지금의 너의 고민이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너. 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라고

나를 완전히 믿어주는 그녀들의 말이 나의 가슴에 깊게 스며들었다.


현실을 과거 속에서, 지금과 과거를 비교하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때처럼 밝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나의 그 시절을 함께 한 그녀들이 있어서 정말 오랜만에, 많이,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새삼, 결국 인생에서 힘들 때마다 나를 살리는 건, 나 자신보다는 나와 가까웠던 내 주변 사람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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