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정해 주고 이해해 주는 물동이
인정과 이해의 물동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짜증 나게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끌 수 있다.
-칼 구스타프 융-
속상함이 주는 힌트
내 관심분야였던 심리학, 철학, 감정, 육아 책 등을 읽으며 '속상한 마음'이 꽤나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거울이나 다른 사람을 통하지 않는 이상 자신을 볼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매번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어서 독서를 했다. 스스로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여러 가지 책을 읽으며 '속상함'이라는 감정도 나를 만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 구스타프 융의 ‘그림자’와 스키마(생각의 도식)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면서 속상함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속상한 사람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이해받지 못할 때' 속상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누가 뭐라든 내 갈길을 갈 거야!'라는 배짱도 없었고,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 지지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특이하다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결국 결이 맞는 친구를 고등학교 때 만나서 마음을 나누긴 했지만 '이해받지 못한 기억'은 조금은 상처로 남아있다.
속상함 속에 있는 '인정과 이해의 물동이'
성인이 되어 애니어그램 관련 책을 읽거나 MBTI관련 영상들을 보니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않으려 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냥 우린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깨닫지 못한 시기라 이상적인 '이해'를 바랐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나와 비슷한 성향의 단짝친구를 만났다. 나와 비슷한 친구를 만나니 그것 만으로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이십 대가 되자 자연스럽게 심리학책에 관심이 갔다. 도서관에서 심리학이나 그리스로마신화, 베르나르베르베르 소설을 차례대로 빌려 읽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책 속의 주인공과 주변사람들을 만나면서 위로받았다. 다양한 주인공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며, 나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십 대 때는 이 책들을 통해 내가 이해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스스로를 인정해 주고 이해해 주는 물동이에 방울, 방물 물이 쌓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는 스스로 물동이를 채우는 과정
책 속에는 모든 게 있었다. 소설 속에 내 마음을 설명해 줄 문장이 있었고, 어떤 학자의 개념 속에도 있었고, 철학자의 시선에도 있었다. 그런 한 문장, 한 문장이 쌓이다 보니 내가 내 마음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복잡하고 다양했던 마음들이 점점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가장 먼저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이해되니 다른 사람의 인정과 이해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제야 내 '인정과 이해의 물동이'에 찰박찰박 물이 채워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인정과 이해를 갈구하지 않으니 스스로 물동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이 물동이는 내가 스스로 채워야 하는 거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다른 물동이도 내가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 번만 성공을 해보면 됩니다' 모든 자기 계발서에서 하던 말이 '이 말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상함이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속상함이란, 어떤 사람과 만나거나 대화를 할 때 속상함을 느끼는 상대의 뉘앙스나 태도, 말을 말한다. 이 주제로 주변사람들과 대화해 본 결과 '무시하는 태도나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에게는 무시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또 내가 가진 속상함을 상대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을 때 상대는 그 일이 아무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때도 많았다. 즉 내가 속상한 것이 누구에게나 속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속상한 상황, 속상한 태도, 속상한 말'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내가 왜 이런 것들이 속상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은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 혼자 충분히 생각해 보고 내가 발견한 속상한 상황과 내 마음을 남편이나 주변 친구들과 나누었다. 나를 지켜본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관찰된 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정보를 너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해주기도 했다. 다행히 도움이 되는 피드백에 상처받지 않는 성격이라 이 과정들이 나를 돌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결국 내가 편해지기 위한 과정
경험을 해보니 이 시간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자유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무작정 내가 궁금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내가 편안해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혼자 발끈하거나, 혼자 상처받는 일의 상당 부분은 내 안에 있는 문제 때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늘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왜 그럴까?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단지 모두들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럴까? 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답은 스스로 내 속상함을 들여다본 후에 알게 되었다. (나만의 답) 바로 사람들의 포인트가 다른 것이다. 배려의 포인트, 무례함의 포인트, 애정의 포인트가 달라서 속상해진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의 절대적 무례함 때문에 속상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속상함을 마주해서 가장 좋은 것은 이것이 나의 속상함인지, 그저 서로의 포인트가 다른 것인지, 상대의 무례함 때문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기만 해도 삶이 심플해진다. 억울함, 분노, 미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물동이, 아이의 물동이
엄마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스스로의 '인정과 이해의 물동이'를 가득 채워주는 것은 육아에서 특히 중요하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나를 무시하나?'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엄마가 있었다. 이 엄마는 아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렇게 하는 행동은 무시하는 행동이야'라고 스스로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정한 것은 모르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이 드는 것이라서) 아이와, 주변사람들, 혹은 세상이 나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인지행동치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론 벡은 이런 생각은 '자동적 사고'라고 말했다. '자동적 사고'라는 용어는 내 인생을 바꿔준 용어들 중에 하나다. 자동적 사고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너무나 딱 붙어있어서 의식조차 못했던 생각을 낱낱이 뜯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잠시 멈춰서 그 생각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들 대부분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때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무시한다는 생각도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동적 사고 : 자극에 대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서 검증되지 않은 순간적,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역기능적인 개인의 신념이나 생각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상담학사전)
속상함을 통해 물동이를 채우다
유독 아이에게 화를 낸 것 같은 날은 컨디션이 떨어진 날일 때도 있지만 나의 속상함이 얹어져 있을 때도 많았다. 내 속상함이 얹어지면 아이의 행동이 무겁게 느껴진다. 무겁게 느껴지는 만큼 아이의 행동이 나에게 힘들게 다가왔다. 다 털어내고 아이가 한 행동만 보기 위해서는 가벼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워져야 몰아세우지 않고 아이를 도와줄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육아가 힘들었던 이유도 무거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독서와 독서한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판단의 물동이는 찰 때마다 비워내야 한다. 상대를 판단하는 물동이는 비우되, 스스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물동이는 꾸준히 채워나가야 한다. 가정에서 인정과 이해의 물동이가 채워지지 않은 아이는 사회에 나가서 또 다른 누군가의 물동이의 물을 원한다. 엄마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자란 아이는 외롭다. 엄마의 역할은 아이의 '인정과 이해의 물동이'를 가득 채워 세상에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스로 물동이를 채우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스스로 물동이를 채울 수 있으면, 아이도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 물동이를 채우는 법을 배워간다. 아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배워가기 때문이다.